[삶의 향기-임한창] 평화와 악마 기사의 사진

한 화가가 있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모습’을 화폭에 담고 싶었다. 그러나 평화의 모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어머니 앞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한 어린이를 보았다. 순진무구(純眞無垢). 어린이의 얼굴은 평화와 순결로 가득했다. 화가가 그토록 오랫동안 꿈꿔온 평화의 모델이 바로 그곳에 있었다. 화가는 기도하는 어린이의 얼굴을 모델로 ‘평화’라는 제목의 그림을 완성했다. 이 그림은 평론가들로부터 ‘어린이의 얼굴에 천사가 앉아 있다’는 평을 들었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화가는 이제 노인이 됐다.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이 그린 ‘평화’라는 작품과 대비되는 ‘악마’라는 그림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그림을 통해 죄가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를 알리고 싶었다. 그때 한 친구가 교도소 독방에 갇혀 있는 흉악범을 소개해주었다.

“이 사람보다 더 무서운 몰골을 본 적이 없어. 자네가 한번 만나보게.”

죄악은 두려운 것이다

화가가 죄수를 방문했다. 어두컴컴한 독방에 한 늙은이가 누워 있었다. 깊게 파인 주름, 핏발이 벌겋게 선 눈, 온몸에 가득한 흉터, 헝클어진 머리카락…. 섬뜩했다. ‘악마’라는 작품의 모델로는 거의 완벽했다. 화가는 죄수의 모습을 그대로 그려냈다. 모든 작업을 마친 후, 화가가 늙은 죄수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름이 뭔가요?”

노인이 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루퍼트.”

화가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 늙은이는 50여년 전, 자신이 그린 ‘평화’라는 작품의 주인공이었다. 어머니 앞에서 기도하던 순결한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얼굴에는 죄악과 타락과 욕심의 파편들만 촘촘히 박혀 있었다.

어느 책에서 읽은 이야기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면 어느 정도까지 악해질 수 있을까. 인간은 선한 존재인가, 악한 존재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두 얼굴을 가진 존재인가. 인간은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물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아담의 후예들이다. 기도와 성찰이 없으면 무너지는 나약한 존재인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삶의 시련을 만난다. 그러나 시련에 반응하는 모습은 전혀 다르다. 역경에 굴복하는 사람이 있고, 그것을 통해 연단되는 사람이 있다. ‘악마’라는 그림의 모델은 시련 앞에서 산산이 부서져버린 나약한 인간의 모습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역경을 감사의 씨앗으로 삼는다. 날카로운 삶의 가시에 통증을 느끼지만, 그것으로 인해 잠든 영혼이 눈을 뜬다. 일종의 ‘필요한 아픔’인 것이다. 말은 맨몸으로 달릴 때보다 등에 적당한 짐이 실릴 때 더욱 빨리 달린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적당한 시련을 만날 때 인생에 가속이 붙는다.

사람들은 모두 우아하게 늙기를 원한다. ‘평화’라는 그림의 모델처럼 되고 싶어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혼의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무슨 일에나 함부로 참견하는 습관도 버려야 한다. 같은 말을 반복하거나 남을 헐뜯는 일은 더욱 삼가야 한다.

노인의 얼굴은 인생 기록이다

사람을 ‘악마’라는 그림의 모델처럼 흉악스럽게 만드는 네 가지 독소가 있다. 그것은 ‘절망·불평·의심·불신’이다. 사람을 ‘평화’라는 그림의 모델처럼 만드는 네 가지 비결이 있다. 그것은 ‘기도·사랑·용서·부드러움’이다. 기도하는 모습에 평화가 깃든다. 불평하면 악마가 접근한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얼마든지 비극적일 수 있다. 기도는 인생을 ‘영원한 평화’로 인도한다. 노년의 얼굴 표정은 인생의 기록이다. 노년의 기도는 표정을 바꾸어 놓는다. 이것이 기도의 위대한 능력이다.

임한창 종교국장 hcl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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