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순만 칼럼] 가난한 사람을 존중해주는 사회 기사의 사진

“인간들의 관계가 바로 세워져야 한다. 한국은 교육에서 1위, 공동체에서 꼴찌다”

이명박 대통령이 13일 아침 라디오 연설에서 “소득이 높고 불공정한 사회보다는 소득이 다소 낮더라도 공정한 사회에서 사는 것이 더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압축 성장을 하고, 외환위기라는 깊은 수렁을 헤쳐나오는 동안 사회가 메말라져서 인정사정없듯이 되어 가는데 대통령이 ‘소득이 다소 낮더라도’를 언급하니까 오랜만에 눈길이 갔다.

흔히들 세계 각국의 행복지수를 조사한 자료를 들어 방글라데시나 부탄과 같이 빈곤한 나라 국민들이 우리보다 행복지수가 높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물론 그럴 수 있다. 모두가 가난할 때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은 크지 않다. 우리의 과거가 그랬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제 그런 시절은 갔다. 모두가 가난한 시절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난하면서도 행복한 사회로 돌아가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배당금 수백억을 받는 오너들과 수십억의 연봉을 받는 임원들이 있고 그 옆에 1500만원을 받는 빈자들이 살아가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똑같이 국내 프로 무대에 진출한 선수라도 연봉 10억 가까이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2000만원을 받고 모질게 뒹굴어야 하는 선수가 있다. 이런 현실을 수용하면서 모두 동행할 수 있고 함께 잘 사는 사회를 꿈꿔야 한다.

이런 불공평을 기반으로 공정을 추구하는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금융 법조 세무 국방 및 일반 공직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전관예우를 없애는 것으로 가능할까. 선출직과 고위 공직자들의 부패를 엄격히 규제하는 내용으로 공직자윤리법을 고치는 것으로 가능할까. 물론 이것은 필요하고, 더욱 세밀하게 바꿔나가야 한다.

그러나 부산저축은행 사태가 보여주듯, 많이 어긋난 사회에서 제도적 개혁으로 불법적 관행이나 도덕적 해이를 바로잡기는 매우 어려워 보인다. 법제화하는 사람의 속내가 미덥지 않고, 감독하는 사람이 신선해 보이지 않으니 근본적인 개선이 가능할 것이라고 여겨지지가 않는다.

다같이 잘 사는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인간들의 관계가 바르게 세워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상대방이 가난하더라도 그 사람 자체를 존중해주는 사회, 내가 가난하더라도 나의 품격을 잃지 않고 든든하게 사는 사회라야 제대로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에 대한 존중심이 없다면 사람들은 물질에 의해 평가받기 마련이다.

이와 관련해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조사 결과가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창설 50주년을 맞아 지난달 발표한 ‘행복지수(Better Life Initiative)’를 보면 한국은 ‘교육’ 부문에서 핀란드에 이어 2위(10점 만점 중 9점)를 기록한 반면 ‘공동체(Community)’ 부문에서는 터키에 이어 최하위(0.5점)를 기록했다. 지구촌에서 최고로 많이 배우지만 배려하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데는 꼴찌라는 것이다.

OECD가 ‘공동체’에 대해 설명한 것을 보면 ‘외부에서 주는 도움의 질(quality of support network)’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서로 믿지 못하고 도움을 주지 못하는 사회의 주역은 인간이 아니라 물질이다. 이런 사회에서 갖지 못한 사람은 무시당하고, 그래서 구성원들이 어떻게 해서라도 챙겨서 살아가는 것을 ‘삶의 지혜’로 여긴다.

없이 살아도 무시당하지 않고 스스로도 존재감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문화적 인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잘 고양시켜서 적절하게 향수(享受)되는 문화는 물질에 굴복되지 않는 가장 강력한 요소다. 문화의 본질은 그것을 향유하는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물질에 사로잡히는 삶을 돌아보게 해준다.

위험을 무릅쓰고 치부를 하면서 접근해오는 사람들이 ‘악마의 덫’을 숨기고 있는지를 의심해야 하는 사회라면 국민소득이 아무리 높아도 구성원들이 속속들이 잘 살 수 없다. 가난해도 괜찮은 사회라야 출산 육아 교육 결혼 취업 노후의 모든 사이클이 어느 정도 순조로울 수 있을 것이다.

수석 논설위원 so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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