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전정희] 이런 나라에 신세지고 싶지 않다 기사의 사진

지난 4월 초 국무회의는 친일 전력을 이유로 ‘독립운동가 김홍량(1885∼1950)’에 대한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 서훈을 취소했다. ‘39년 일본군 병사부 참여’ ‘41년 일제 지원병 제도 선전 순회강연’ ‘42년 비행기 헌납금 모금 주도’ 등이 이유다. 김홍량은 백범 김구의 ‘감옥동지’이자 3·1운동 당시 김구를 안전하게 상하이로 빼돌렸다. 또 독립기념관이 구축한 사료 등에는 황해도 안악에서 애국계몽운동과 교육 분야에 큰 업적을 남긴 인물로 기록됐었다.

그의 4남 김대영 전 건설부 차관은 최근 국가보훈처를 상대로 서훈 취소 처분을 취소해 달라고 소송을 냈다. 본보를 통해 김대영씨는 “이번 서훈 취소로 당장 서울현충원 안장 유골을 이장해야 한다. 정부의 요구다. 내 일이라면 정부의 처사에 참을 수 있으나 불효가 되는 것은 참지 못하겠다. 이런 나라에 신세지고 싶지 않다”며 이장을 추진하고 있다.

친일파로 몰린 독립운동가

이 사안에 대해 정부는 논거를 바탕으로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헌납금 모금 주도’와 같은 사료(fact)가 ‘법리’가 된 셈이다. 김홍량은 주로 1937년부터 광복 전까지 집중적으로 친일 행위를 했다. 친일 문제를 연구하는 정운현씨에 따르면 1941년 황해도 도회 부의장 피선, 1944년 국민총동원총진회 이사 임명 등 총 10항목이 된다. 그렇다고 아들 입장이 이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나라 위해 그렇게 많이 (독립운동)했는데 일부가 부정하다고 가치를 왜곡하면 되느냐”고 항변했다.

김홍량의 아버지 김용승 진사는 황해도 안악의 지주다. 신교육만이 민족의 살길이라고 생각하고 크리스천 지식인과 뜻을 같이해 학교를 세웠다. 황해도에 양산중학, 안악남중과 여중 그리고 서울의 미션스쿨 경신학교 등이다. 아들 김홍량은 1907년엔 안창호 양기탁 등과 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 농촌 개혁에 힘썼고 1910년엔 김구 안윤재 등과 무관 양성학교 설립을 위해 군자금을 조달했다.

농장과 무역으로 주로 민족자본을 만드는 것이 김홍량의 몫이었다. 한데 1911년 일제가 안중근 동생 안명근이 벌인 독립운동을 빌미로 안악사건을 만들어 김구 등과 함께 체포했고 여파로 양산중학은 폐교된다. 김홍량은 4년 옥살이를 했다.

1937년∼45년 친일 행적. 그는 이 기간 재령 신천 안악 일대 갈밭을 간척해 이곳에서만 매년 25만석을 추수했다. 이전 13만석이었다. 당시 상상도 못할 포드 자동차만 8대였다. 매제 최태영(1900∼2005·법학자·학술원 회원)은 회고록에 ‘이익금을 교육 공익사업에 투자하기로 했고 최종 목표는 가장 큰 규모의 (민족)대학을 세우는 것이었다’고 적었다. 이미 일제에 학교를 세 번이나 뺏긴 김홍량은 일제 말기 민족자본가로, 교육가로 살아남는 것이 중요했다. 바로 친일의 이유인 듯하다. 경신학교(현 경신고)마저 빼앗으려 하자 포드 차 8대를 바치고 학교를 살렸다.

100% 깨끗하기만은 어렵다

김홍량도 “이제 죽나보다”는 말을 남기고 도청에 들어갔다. 김홍량은 광복 후 미군정이 일본인을 내세워 학교 행정을 하고 대학 총장은 미국인을 내세우자 크게 실망하고 경신학교를 장로교 재단에 맡기고 교육에서 손을 뗀다.

무기를 들고 싸우는 첼롯당원만이 독립운동가는 아니다. 또 그가 박영효와 같이 어느 시점부터 명백하게 친일했다면 단죄 받아 마땅할 수도 있다. 독립운동가인 그는 살아남기 위해 자기 위치에서 방편에 맞게 책략한 것은 아닐까? 광복 후 김용승은 공산당에 시달리다 자살했고, 그의 또 다른 아들 김중량은 인민군에 총살당했다. 몰락은 충분히 했다.

전정희 종교기획부장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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