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시사 > 전체기사

[한국의 기독교 성지 순례] 가난한 조선 민중 돌보던 ‘인술의 요람’

[한국의 기독교 성지 순례] 가난한 조선 민중 돌보던 ‘인술의 요람’ 기사의 사진

(16) 의료선교 효시 광혜원

서울 노고산동 지하철 2호선 신촌역. 15일 오후 평소와 다름없이 젊은이들로 붐볐다. 신촌 명물거리를 따라 걸었다. 젊은 여성의 짧은 옷차림, 모자를 눌러쓴 채 농구공을 바닥에 튕기며 지나가는 남학생. 상점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최신 유행가는 귀에 와 꽂혔다. 분주한 도시풍경 그대로였다.

연세대학교 교정에 들어서도 젊음의 물결은 넘실댔다.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학생들 모습은 싱그럽기 그지없었다. 캠퍼스의 정취를 느끼며 백양로를 따라 걸었다. 하늘은 파랗고 나뭇잎은 짙은 초록빛을 뿜었다. 마음마저 깨끗해지는 듯했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한옥이 눈에 들어왔다. 연세대박물관 옆, 인적 드문 길을 따라 끌리듯 올라갔다.

광혜원을 만나다

입구. 마치 건장한 남성이 탄탄한 근육을 내놓고 있는 듯 기개가 있었다. 입구는 ‘연세역사의뜰’이라 쓰인 이름표를 이마에 붙이곤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었다.

한 발 들어섰다.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쓸고 지나갔다. 어서 오라는 인사 같았다. 문 하나를 넘어섰을 뿐인데 그 안은 밖과 달랐다. 바닥의 잔디는 1년 중 가장 예쁜 옷으로 이미 갈아입었다.

영화 ‘라붐(1980)’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시끄러운 공간 속, 빅(소피 마르소 분)의 귀에 헤드폰을 씌워주는 남자. 헤드폰을 통해 흘러나온 노래 ‘Reality’는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뜰 안에 발을 디뎠을 때의 느낌이 딱 그랬다. 고층빌딩 숲속 한옥, 마음에 평안함을 건넸다.

왜 이곳에 이런 공간이 있을까. 답을 찾는데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뜰에 들어서자 정면에 보이는 오래된 한옥, 광혜원(廣惠院)이 그 답이었다.

광혜원은 1885년 2월 29일 고종이 미국 북장로회의 의료선교사인 호레이스 알렌의 건의를 받아들여 서울 재동에 설립한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이다. 세브란스병원의 전신이기도 하다. 연세대는 광혜원을 캠퍼스 내에 복원하고 그 주변을 연세역사의뜰로 꾸몄다.

목조 유적지 중 내부에 들어갈 수 있는 곳은 많지 않다. 그러나 이곳은 달랐다. 건물은 연세사료관으로 꾸며져 개방돼 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 주세요’라는 문구에 따라 운동화를 가지런히 벗어놓은 채 유리문을 밀었다.

제일 처음 눈에 들어오는 사진. 1885년 당시 광혜원의 모습이다. 사료관에는 의술로 하나님의 뜻을 펼친 알렌 선교사와 그가 사용한 치료 기구 사진이 보존돼 있었다. 기독교 전래 초기 한글로 번역된 신약성서, 1897년 4월 1일 원두우(언더우드 선교사) 박사가 창간한 ‘그리스도 신문’도 그 모습 그대로다. 구한말 하나님이 보낸 선교사들의 조선인을 향한 사랑, 따뜻함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널리 은혜를 베풀다

1884년 9월 조선에 들어온 알렌은 갑신정변(1884년 10월) 때 칼을 맞아 중상을 입은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익을 치료해 생명을 구했다. 민영익의 치명적 상처가 서양 의술로 완쾌되자 조선인들은 흥분했다. 어떤 사람은 알렌에게 멈춘 시계를 가져와 ‘(바늘이) 다시 움직일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사고 당시 24세였던 민영익은 두 살 위 알렌과 ‘형제의 의’를 맺었다. 이후 고종의 총애를 받게 된 알렌은 왕실부 시의관(侍醫官)으로 임명되었다. 이는 그가 선교에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주춧돌이었다.

알렌은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근대식 병원 설립의 필요성을 고종에게 조심스레 건의했다. 고종은 윤허했고 광혜원은 지금의 서울 재동(헌법재판소 자리)에 설립됐다. ‘광혜’는 ‘널리 은혜를 베푼다’는 뜻. 하나님의 사랑으로 백성의 질병을 치료했다.

알렌은 ‘병원건설안’에서 “이 병원은 가난한 사람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명시했다. 그는 민중 개념이 뚜렷하지 않았던 당시 “초근(草根)을 위해 일한다”고 천명해 기독교 한국 민중사의 첫 장을 열었다.

병원 설립과 운영에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The Foreign Missionary’ 1886년 7월호에 따르면 광혜원 설립을 저해하는 걸림돌은 여럿이었다. 장로교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타국 외교관들은 이 병원이 ‘장로교 기관’이라는 사실을 걸고넘어졌다. “기독교인이 아니면 치료하지 않는다”는 중상모략도 있었다.

그러나 고종과 명성황후의 근대적 병원에 대한 열망, 기독교에 대한 민중의 호감, 알렌의 진심 등이 합해져 광혜원이 설립됐다. 외국의 기독교 사도(使徒)가 정식으로 국내 공공기관에서 일하게 된 것은 이 때가 최초였다. 한국교회사의 머릿돌과 다름없는 중요한 장면이다.

1885년 4월 26일 광혜원은 제중원(濟衆院)으로 명패가 바뀐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외과 환자가 많았기 때문에 외과 수술에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던 알렌을 찾는 환자는 인산인해를 이뤘다.

이후에도 그는 이곳에서 수많은 환자를 고치며 의료선교를 펼쳐 나갔다. 지금도 신촌세브란스병원 1층 로비에는 알렌 선교사가 미소를 머금고 있는 흉상이 환자를 바라보고 있다.

조국현 기자 jojo@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