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 옛 그림] (76) 이마에 스치는 솔바람 기사의 사진

해가 높이 뜨고 낮이 길면 하지다. 하지를 넘어 모심기가 끝날 즈음 물쿠는 폭염이 온다. 더워도 시골의 여름은 농사일로 연중 가장 바쁘다. 여름에 하루 놀면 겨울에 열흘 굶는다지 않는가. 논일 밭일에 눈코 뜰 새 없이 몸을 굴리느라 땀 마를 날이 드물 때면 서늘한 바람, 시원한 물소리가 애타게 그립다.

한여름 날 노인이 계곡물 콸콸한 산중을 찾았다. 소나무 아랫동아리에 털퍼덕 주저앉아 웃통을 벗어젖히고 부채질한다. 흐르는 물에 무릎까지 담그고 나온 뒤라 맨발이다. 더위를 타고 오른 물방울이 나뭇가지에 안개를 드리워 솔숲이 너끈히 시원해졌다. 노인은 지금 신선이 따로 없는 표정이다. 솔바람 찬흐름을 독차지했다.

처신 꼿꼿한 선비들은 여름 피서도 눈치 봤다. 송나라 왕령이 그랬다. 곤륜산 꼭대기에 눈 있고 봉래산 비탈에 그늘 있어도 사람들 다 데려갈 수 없기에 혼자 그곳에서 여름을 날 수 없다고 말했다. 당나라 백거이는 그래서 방안에서 홀로 좌정하며 더위 짜증을 식혔다. 해도 이런 피서는 스스로 느낄 뿐 남과 함께하기는 어렵단다. 더위나기를 자기수행처럼 여긴 셈이다.

신발 던지고 민머리 드러낸 저 노인은 눈치 안 보고 자오(自娛)한다. 요란스럽지 않으면 됐지, 더운데 무슨 양반 따지느냐다. 이태백의 시도 거든다. ‘깃털부채 부치기 나른해/ 푸른 숲에서 윗옷을 벗었네/ 망건 풀어 석벽에 걸어둔 채/ 이마 드러내고 솔바람을 쏘이네’ 겸재 정선이 초가을에 그린 그림이다. 지난 무더위가 지독했던지 납량의 기억을 새삼 떠올린 모양이다. 옛 사람의 소박한 피서를 보면 등골에 진땀도 마른다.

손철주(미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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