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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탁석산의 스포츠 이야기] 한여름밤의 꿈

[철학자 탁석산의 스포츠 이야기] 한여름밤의 꿈 기사의 사진

오늘은 옛날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아주 가끔은 지난 시절이 떠오르는 때가 있습니다. 나이를 먹어가는 것도 있겠고 날씨 탓도 있겠지요. 무더웠지만 잊히지 않는 여름밤 이야기입니다. 중학교 1학년인가 2학년 여름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1969년 아니면 그 다음해였을 겁니다. 한여름밤에 동대문야구장에 갔습니다. 당시 저는 방학에는 하루 종일 야구장에서 살았습니다. 고등학교 야구가 인기 절정일 때였는데 오전 첫 게임부터 서너 게임을 계속 봤던 것 같습니다.

그날도 혼자 야구장에 갔습니다. 그날은 재일동포 야구팀과 당시 최강이었던 선린상고의 시합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재일동포 고교 야구단의 방문 경기가 없어졌습니다만 당시에는 재일동포 야구단에 대한 관심이 높았습니다. 물론 동포라는 점도 있었지만 당시만 해도 야구 수준은 일본이 월등히 높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최강 선린상고와 붙으면 어떻게 될까 하는 호기심에 동대문야구장은 가득 찼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날 밤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재일동포 팀의 투수가 대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언더스루 투수로 공이 빠르게 솟구치는데 선린상고 타자들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너무 공이 좋았던 것이지요. 물론 언더스루 투수를 처음 본 것은 아니었지만 수준이 달랐던 겁니다. 밤이어서 그랬는지 더 빨라 보였습니다. 투구에 매료됐지요.

그런데 선린상고 투수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바로 유남호 선수였습니다. 후에 기아 타이거즈 감독을 지낸 분이지요. 유명한 선수여서 당시에도 이름을 알고 있었습니다. 유남호 투수도 속구를 앞세워 아주 잘 던졌습니다. 하지만 재일동포 팀이 먼저 한 점을 냈고 이대로 끝나는가 했던 시합은 제 기억에는 9회 말 실책이 겹쳐 안타 없이 선린상고가 득점을 해 비긴 것으로 남아 있습니다. 아마도 선린상고가 안타는 하나도 못 쳤을 겁니다. 정말 숨 막히는 투수전이었지요.

청량리 밖에 살고 있던 저는 늦은 밤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운동장을 나와 버스를 타기 위해 인파를 헤치고 바쁜 걸음으로 정류장을 향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슬로비디오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솟구치는 투구 하나하나가 마음속에서 천천히 다시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1986년인가 청보 핀토스에 재일동포 투수가 입단했습니다. 바로 제 마음속에 남아 있던 투수였습니다. 김기태 투수였습니다. 일본 프로야구에서 맹활약하다 입단하게 됐는데 나이 탓인지 뚜렷한 활약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날의 게임도 수많은 경기 중 하나였을 뿐이겠지요. 하지만 누군가의 마음속에는 한여름밤의 꿈처럼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도 그런 꿈이 만들어지고 있겠지요.

탁석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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