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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기독교 성지 순례] “하나님만 경배” 신사참배 거부하다 순교

[한국의 기독교 성지 순례] “하나님만 경배” 신사참배 거부하다 순교 기사의 사진

(17) 강원도 동해 천곡교회 ‘최인규 순교비’

21일 강원도 동해시 천곡동 천곡감리교회 앞. 3m 높이의 대리석 조형물은 허리가 잘록했다. 크고 작은 피라미드의 상단을 잘라내고 큰 것 위에 작은 것을 뒤집어 얹은 형태였다. 꼭대기에는 농구공만한 구가 올려다 보였다. 권사 최인규 순교비였다. 최 권사는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옥사했다. 순교비는 그가 만들어 쓰던 강대상 위에 지구를 올린 모양이라고 고문석(56) 담임목사가 설명했다.

회심

최인규는 몰락한 강릉 최씨 양반집에서 1881년 출생했다. 강원도 삼척군 북삼면 송정리(지금 동해시 송정동) 생가는 첩첩의 산과 망망대해 사이에 있었다. 1898년 결혼한 뒤 농사를 지었다. 아내는 결혼 7년 만에 딸을 낳고 병들었다. 온갖 약을 갖다 먹이고 푸닥거리를 수차례 했다. 아내는 오래 앓다 죽었다.

그는 술로 살았다. 사귀던 과부는 임신하고 마을을 떠났다. 딸은 옆마을로 시집갔다. 시장을 배회하고 주막을 드나들었다. 불쌍하다는 사람이나 미쳤다는 사람이나 그를 향해 혀를 차긴 마찬가지였다.

1924년 북평교회에서 김기정 목사를 만났다. 김 목사가 월간 ‘가뎡(가정)잡지’를 권했다. ‘술을 좋아하는 여러분은 취중에 정신을 가다듬고 이 말씀을 들어보시오’라며 시작하는 어느 목사의 글은 자신을 향한 충고 같았다. 음주로 빚어지는 폐해들을 담고 있었다. 최인규는 술을 끊고 담뱃대를 꺾었다. 25년 세례받고 32년 권사로 임명됐다. 당시 권사는 교회를 맡아 전도사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이듬해 북삼면 천곡리(지금 천곡동)에 천곡교회을 세웠다. 논밭 6396.69㎡(1935평)를 교회 부지로 내놨다.

그는 잔재미가 없었다. 남 말과 농담을 싫어했다. 누가 남 얘기를 하면 “사람이 다 그렇지”라며 말을 막았다. 보고 들은 이야기를 전하는 책장수에게 “시시한 소리 그만하라”고 면박을 주기도 했다.

30년대 중반 묵호교회(지금 동해교회) 이수정과 밤늦도록 밀담을 나눴다. 신앙과 조선의 해방이 주제였다. 이수정은 의병으로 항일전투에 참가하고 3·1독립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한 인물이었다.

순교

최인규는 신사참배를 거절했다. 각종 부역과 과세에도 불응했다. 이 사실을 확인하러 온 관리에게 “나는 재산과 생명을 모두 하나님께 바쳤다. 다른 세상일은 못 하겠다”고 잘라 말했다.

신사참배에 참여하라는 전갈이 천곡교회로 왔다. 38년 10월 장로교·감리교 총회 후였다. 천곡리에선 서낭당을 신사로 썼다. 최인규는 “신사는 우상이다. 나는 하나님께만 경배한다”며 두문불출했다.

40년 5월 불경 혐의로 경찰에 체포됐다. 형사는 국가의식을 존중해 달라는 것뿐이라며 회유했다. 신사참배는 다른 신에 굴복하는 것이지 국가 행사일 수 없다는 게 최인규의 생각이었다. 경찰은 그에게 똥통을 지게 하고 동네를 끌고 다녔다. 그는 “내가 신사참배를 거역한 최인규”라고 소리쳐야 했다.

교인이 일본인 서장에게 간청했다. “최인규는 정신이상자였는데 예수 믿고 나았다가 재발한 듯하니 석방해 주시오.” 서장은 “당신이 정신병자다. 예수를 믿으려면 최인규같이 믿어”라고 호통쳤다.

최인규는 함흥재판소에서 “기독교를 박해한 로마는 망했다. 일본은 우리 민족을 못살게 하는 죄악을 회개하지 않으면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고 말했다. 41년 판사는 불경죄로 징역 2년을 선고했다.

환갑의 최인규는 고문으로 쇠약해졌다. 함께 수감된 목사가 “신사참배를 하겠다는 말만 하고 나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최인규는 “목사인 줄 알았더니…”라며 돌아앉았다. 간수들은 그를 정신이상자로 취급했다. 최인규는 42년 12월 6일 대전형무소에서 숨졌다. 천곡교회는 43년 철거됐다.

비석

최인규의 유골은 광복 후 거둬졌다. 동료 교인이 46년 3월 자전거를 타고 가서 찾아왔다. 삼척제일교회 정문 우측에 안장했다. 강릉의 교회들이 기념비를 세웠다. 비석에는 순교의 숭고함을 새겼다.

‘눈서리 어리는 혹한이 푸른 대의 자태를 손상할 수 없고 먼지 따위가 백옥의 빛을 변하게 할 수 없음같이 악법과 혹독한 고문이 필부의 뜻을 빼앗을 수 없도다. (중략) 그 맑은 뜻을 지킴이여 엄동에 대나무와 먼지 속 백옥에 비추어 부끄럼이 없으니 죽었으나 우리의 주께서 영광을 주리로다.’

천곡교회는 50년 최인규 기념예배당으로 재건됐다. 이전과 증축을 반복했다. 82년 10월 지금의 땅에 착공했다. 86년 12월 공사 중인 천곡교회 앞에 유골이 이장됐다. 교인들이 순교비를 복원했다.

순교비 오른쪽에는 사도 바울의 결의가 적혔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천곡교회 고문석 목사는 “오늘날 많은 성도가 적당한 선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자신의 시간과 재능을 희생하려 하지 않는다”며 “최인규의 신앙을 본받아 순교자의 심정으로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인규의 강대상은 천곡교회 본당에 있었다. 교회 철거 후 다른 교회를 떠돌다 67년에 돌아왔다. 1m 높이의 적갈색 강대상은 위판 옻칠이 벗겨져 비늘처럼 일어났다. 수납장 여닫이는 경첩의 못이 빠져 헐거웠다. 최인규는 천곡교회를 짓고 같은 강대상 셋을 만들었다. 다른 교회에 줬던 2개는 소실됐다.

동해=강창욱 기자 kcw@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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