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임한창] 닭과 십자가 기사의 사진

성경은 종종 동물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묘사한다. 사자와 다니엘, 요나와 대형 물고기, 엘리야와 까마귀, 노아와 비둘기, 베드로와 닭이 바로 그런 경우다. 이 동물들은 모두 은총의 도구였다.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예배당 종탑에 금속으로 만든 닭이 자리한 것을 보게 된다. 십자가가 놓일 자리에 붉은 닭이 버티고 서 있는 모습이 좀 어색하다. 그러나 거기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닭은 울어야 한다

왜 닭인가. 유럽교회는 베드로를 각성시킨 ‘닭의 울음’을 통해 인류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있다. 베드로가 누구인가. 그는 예수를 미치도록 사랑한 사람이었다. 배신을 예언한 예수를 향해, 죽더라도 배반은 없다며 오히려 화를 낸 인물이다. 그는 급한 성격으로 종종 낭패를 당했고, 실수와 실언과 실패를 수없이 경험했다. 끌려가는 예수를 끝까지 따라간 의리 있는 제자였다.

예수는 그런 베드로를 향해 예언했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째 부인하던 바로 그 순간, 어디선가 닭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그때 예수는 슬픈 표정으로 베드로를 바라본다. 이 모두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위험과 무력 앞에서 한없이 나약한 인간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되는 사건이다. ‘닭의 울음소리’는 베드로에게 공포 그 자체다. 예수를 향한 배신의 확인이었다. 베드로는 닭의 울음소리를 듣고 가슴을 치며 회개한다. 자신의 죄악과 경솔함을 뉘우친다. 베드로에게 닭의 울음소리는 가슴의 비수처럼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베드로의 가슴을 후비던 닭의 울음소리가 유럽교회 종탑에서 다시 들려오고 있다. 빛과 소금의 사명을 망각한 교회를 향해, 현실을 핑계로 끊임없이 예수를 부인하고 조롱하는 현대인들을 향해 베드로의 닭이 울고 있다. 그 닭은 ‘배신’과 ‘회개’로 이어지는 인간의 나약함을 고발한다.

교회는 우는 닭이다

교회는 닭과 같은 존재다. 울지 않는 닭은 닭이 아니다. 닭은 목청껏 울 줄 알아야 한다. 좁은 양계장에서 부귀와 영화의 모이를 쪼느라 우는 것을 망각한 살찐 닭은 복날의 영양식으로 사용될 뿐이다. 울지 않는 닭의 비극적 종말이다. 교회는 주님의 재림을 알려야 한다. ‘회개하라’고 끊임없이 울어주어야 한다. 그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침묵하는 교회는 생명이 없다. 세상 불의에 항거하는 용기도 있어야 한다.

세상은 변한다. 그러나 복음은 영원하다. 교회는 불변하다. 교회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다. 그곳에는 항상 닭의 울음이 존재한다. 닭은 주로 아침에 운다. 닭의 울음은 ‘하나님의 아침’을 상징한다. 또한 ‘통회의 기도’를 의미한다. 교회는 세상을 깨우는 곳이어야 한다.

종탑에 걸린 닭이 주는 메시지는 실로 다양하다. 기도가 없는 교회, 예언자의 목소리가 없는 교회는 울음을 잃은 닭과 같다. ‘부귀’와 ‘영화’라는 이름의 모이에 취해 우는 것을 잊어버린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유럽교회가 왜 쇠퇴했는가. 금속으로 만든 닭처럼 우는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알을 낳지 못하는 늙은 닭처럼 퇴화했기 때문이다. 화려했던 과거만 회상하는 것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한국교회 종탑에는 붉은 십자가가 달려 있다. 닭보다는 훨씬 좋아 보인다. 문제는 십자가 밑에 모인 신자들의 신앙이다. 지금은 초대교회의 헌신과 열정이 많이 식어 버렸다. 우렁찬 기도의 함성도 점점 잦아들고 있다. 이제 황금의 닭이 아니라, 피가 흐르는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한다. 유럽교회 종탑에 자리한 붉은 닭이 한국교회에 주는 교훈이다.

임한창 종교국장 hcl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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