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순만 칼럼] 외교부 귀찮게 하면 여권 안 내주나 기사의 사진

“해외서 문제되면 여권 제한하겠다…국가 자존심도 양심에 대한 개념도 없다”

남의 나라 이야기부터 해보자. 미국은 자국민이 외국에 나가 미국 정부를 성가시게 하는 일을 했을 경우 몇 년 동안 여권을 발급해 주지 않고 주거와 이전의 자유를 제한하는가. 그 미국인의 행위가 민주국가에서는 잘못된 것이 아니거나 양심적인 것으로 인정받는 것임에도 상대국에서 문제를 삼는다면 여권법을 개정하면서까지 그에게 여권 발급을 거부하는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미국만이 아니라 어느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도 그런 식으로 국민의 자유를 제한하지 않는다. 실례를 들어보자. 2009년 3월 미국 여기자 로라 링과 유나 리는 중국과 북한의 접경지대에서 탈북자를 취재하다 북한 국경을 넘게 됐고, 4개월 이상 북한에 억류되면서 워싱턴의 주요 현안이 됐다. 2009년 크리스마스 날에는 한국계 미국인 로버트 박이 두만강을 건너 북한에 입국했다. 그의 행동은 북한 주민들의 인권향상을 위한 것으로 북한 수뇌부를 곧장 겨냥했기 때문에 북·미 간 긴장은 더 한층 증폭됐다.

그러나 미 정부는 이들을 죄인 취급하지 않았다. 전직 대통령들이 나서서 문제를 풀었고, 미국 사회는 이들의 행동을 평가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로버트 박은 지금도 곧잘 한국에 나와 북한인권운동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미국 주요 언론에서도 그의 주장과 기고문을 싣고 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어떤가. 외교통상부는 우리 국민이 외국에 나가서 골치 아픈 문제를 야기할 경우 앞으로 여권 발급을 제한하겠다는 내용의 여권법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예고한 후 개정 절차에 착수해 종교·시민단체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주요 내용은 여권법 23조 2를 신설해 외국에서의 위법행위로 인해 강제출국 처분을 받은 사람은 3년간, 여권법 및 출입국 관련 범죄는 2년간, 기타 위법행위로 인해 해당국가 또는 관계 행정기관이 항의·시정 등을 제기한 경우는 1년간 여권 발급 및 재발급을 제한한다는 것이다.

이는 국민의 자유를 우습게 여기는 공직자들의 탁상에서 나온 졸렬한 법안이다. 인권을 억압하거나 종교 활동을 금지하는 국가에서 인권이나 종교 활동을 하다가 강제추방을 당했다고 해서 우리나라 여권을 내주지 않는다면 이건 주권국가의 자존심을 팽개치고 독재국의 논리와 가치를 그대로 존중하겠다는 망상이다. 세계인들과의 연대가 확산되고 있는 오늘날 우리 국민이 해외에서 민주화투쟁 시위에 동참했다가 체포·구금된다면 우리 정부는 그 나라 정부에 항의해야지 국민의 여권을 빼앗을 일이 아닐 것이다.

1970년대 유신정권 때 인혁당 사건을 미국 뉴욕타임스에 알려 우리나라에서 추방됐던 오글 목사와 시노트 신부는 미국에 돌아간 후 외국에 나가지 못하도록 여권의 제한을 당하기는커녕 비민주국의 자유와 인권을 위해 헌신한 목회자로 존경을 받았다.

거주·이전의 자유란 국가 권력의 간섭을 받지 않고 주소와 거주지를 정하거나 그곳으로부터 자유롭게 이전할 수 있는 국민의 기본적인 권리다. 국민이 출국할 수 있는 자유도 여기에 당연히 포함된다. 이렇게 중대한 국민의 자유를 제한(혹은 침해)하려고 하면서도 그 대상을 막연하면서도 포괄적으로 ‘외국에서의 위법한 행위 등으로 국위를 손상한 자’라고 규정하고 있다. 뭐가 ‘국위’를 손상시키는 것이고, 어느 정도 돼야 그렇다는 말인가. 외무공무원들을 귀찮게 만드는 행위는 모두 그렇다는 것인가.

알다시피 이 문제는 1000만명 해외여행 시대에 한국인의 범죄행위가 증가하고, 일부 개신교계의 이슬람권 선교가 잦은 갈등을 일으킴에 따라 법령의 정비가 필요하다는 데서 출발한 것이다. 그렇더라도 국제적인 시각을 지닌 외교부가 이렇게 싸잡아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겠다고 나서리라고는 예상할 수 없던 일이다. 상대국에서 문제 삼는다고 무조건 문제시할 것이 아니라 국가의 자주권과 국민의 자존심을 지켜야 하고, 국제사회에서 인정되는 가치와 양심을 보호해야 한다. 그런 수준이 아니라면 법령 개정은 하지 말아야 한다.

임순만 수석논설위원 so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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