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 옛 그림] (82) 아들아, 자식 좀 낳아라 기사의 사진

잎맥 또렷한 잎사귀 아래 포도송이가 드문드문, 티 없이 잘도 여문다. 어쩌면 이토록 씨알이 낱낱이 굵고 탱탱할까. 풋된 알과 익은 알 모두 속이 차 옥구슬 같다. 위로 아래로 삐져나온 덩굴손은 기댈 곳을 찾으며 하늘거린다. 여름이 길러낸 검자줏빛 단맛, 눈으로 봐도 침이 고인다.

포도는 문기 있는 화가들이 즐겨 그린 소재다. 포도 그림 하나로 이름을 알린 조선 화가도 몇 된다. 송이가 탐스러워 먹빛으로 윤기를 내는 재미가 있고, 덩굴이 엉키고 벋는 모양은 붓질을 신명나게 한다. 그릴 때는 열매와 덩굴을 꼭 함께 넣어야 한다. 포도의 속뜻이 간곡해서다. 알알이 맺힌 열매는 ‘다자(多子)’를 상징한다. 띠처럼 생긴 덩굴은 한자로 ‘만대(蔓帶)’다.

두 단어를 합쳐서 살짝 비틀면 ‘자손만대(子孫萬代)’로 읽힌다. 후손이 번창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포도 그림에 숨은 셈이다. 우리 문학에 나타난 포도의 이미지도 그림 못지않게 갸륵하다. 이육사의 ‘청포도’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수건’과 잘 어울린다. 바다 건너 존 스타인벡의 강퍅한 ‘분노의 포도’와는 결이 다르다.

이 그림은 여성 작품이다. 그려진 사연을 읽어보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때는 계사년 음력 6월, 어미인 월성 김씨가 그려 아들 인환에게 준다.’ 김씨는 화가 강희안과 문인 강희맹 형제 집안의 아랫대 며느리다.

따먹으라고 준 포도가 아니다. 가문이 번성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담긴 포도다. 글씨는 또박또박 힘주어 썼다. 묘사력이 좀 뒤져도 포도 알은 탱글탱글하게 그렸다. 이게 아들에게 비는 어미의 심정이다. ‘무자식 상팔자’가 가소로운 그림이다.

손철주(미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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