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의 가시’ 안은 채 선교 열정 불태우고 떠나다… 故 하용조 온누리교회 목사의 발자취

‘육체의 가시’ 안은 채 선교 열정 불태우고 떠나다… 故 하용조 온누리교회 목사의 발자취 기사의 사진

‘꿈쟁이(비저너리)’ ‘종합병동’ ‘강해설교 대가’ ‘영원한 청년’ ‘목사와 평신도 동역이라는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목회자’ ‘선교사를 꿈꾼 목회자’.

고(故) 하용조 온누리교회 목사를 일컫는 말은 셀 수 없을 정도다. 그만큼 한국교회에 남긴 족적이 크고 다양하다. 특히 28장으로 끝난 사도행전을 이어받아 한국교회가 29장을 써내려가야 한다며 선포한 ‘Acts 29’ 비전은 한국교회의 새 방향을 제시했다는 평을 듣는다.

◇‘떠남과 만남’의 삶을 살다=하 목사는 결정적일 때마다 떠났다. 그리고 새로운 만남을 가졌다. 그는 평소 “한경직 목사님에게서 목회자의 겸손과 온유를, 김준곤 목사님에게선 기도와 말씀의 능력을, 주선애 장신대 명예교수에게선 사랑을, 가나안농군학교 김용기 장로에게선 긍휼사역을 배웠다”고 고백하곤 했다.

그가 선교 중심 목회를 하게 된 것은 어려서부터 외국 선교사들의 헌신을 곁에서 지켜봤기 때문이다. 6·25전쟁 중 평안남도 진남포를 떠나 목포로 피란 온 그의 가족은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았고 선교사들의 헌신은 하 목사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모태신앙인인 그는 건국대 재학시절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고 1966년 경기도 입석에서 열린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여름 수련회에서 사역자로서의 부르심을 확인했다. 하 목사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 적이 있다. “예수님을 정신없이 좋아했어요. 목이 쉬도록 찬송하고 울면서 기도했어요. 밤새워 성경을 읽었습니다. 지금 외우고 있는 성경구절은 거의 그때 외운 것입니다.”

CCC에서 7년간 사역하던 그는 72년 장신대 신학대학원에 입학했다. 이때 함께 공부한 동기가 김지철(소망교회) 이수영(새문안교회) 목사 등이다. 76년 목사 안수를 받던 해, 그는 2년 전부터 곽규석 등 코미디언, 배우, 가수 등과 함께 시작한 성경공부 모임을 기반으로 연예인교회를 개척했다.

연예인교회가 부흥하고 성전이 완공될 무렵 간경화로 교회를 사임했다. 80년 치료와 휴식차 영국으로 건너가기 전 두란노서원을 창립했다. 그리고 영국에서 치료와 쉼보다는 또 다른 일을 찾아냈다. 평생의 멘토인 강해설교 대가 데니스 레인 목사와 복음주의 지성인 존 스토트 목사를 만난 것. 특히 스토트 목사를 통해 과거 역사를 되돌아보고 현재 삶을 규명한 뒤 미래를 조명해나가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그렇게 해서 두란노서원의 4대 축이 만들어졌다. 4대 축은 교회 성장과 성숙을 돕고, 세상의 문화를 변혁시키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다. 하 목사의 고유 브랜드인 두란노 바이블칼리지, 아버지학교, 어머니학교, 천만큐티사역, 천만일대일사역, 출판사 사역 등도 여기서 나왔다.

◇“질병은 나의 동반자”=그에게 평생의 가시는 육체의 질병이었다. 대학 3학년 여름수양회에서 폐결핵이 발견됐다. 밤 12시까지 전도하러 다닐 때였다. 어느 날 새벽 시편을 읽던 중 환상을 보게 됐다. 주님이 직접 나타나 그에게 목사가 될 것을 권고했다. “두 번째 주님을 만났을 때 전 주님으로부터 정중한 초대를 받았어요. ‘네가 목사가 되지 않겠느냐’ 하나님은 저를 병원에다 집어넣고 아무도 못 만나게 하시고는 고독하게 만들었습니다. 절망 가운데 성경을 보게 하셨어요.”

폐결핵 치료차 먹은 약의 부작용으로 당뇨와 간염을 앓았다. 당뇨는 고혈압으로 이어졌다. 또 신부전증으로 발전해 1주일에 3번 투석해야 했다. 간염은 간경화를 거쳐 간암으로 퍼졌다. 암 수술도 7차례나 받았다. 하지만 그는 질병이 오늘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했다. “하나님은 병이라는 고난의 풀무 불에 집어넣어 연단하셨어요. 내가 교만할 것을 아시고 바울의 가시처럼 질병을 꽂아 놓으셨죠. 저는 병이 도지면 꼼짝 못합니다. 하지만 병 때문에 설교를 못한 적은 없었어요. 병과 설교는 언제나 동행합니다.”

◇묵상, 삶, 결단으로 이어지는 강해설교=85년 영국에서 귀국, 12명의 교인으로 온누리교회를 시작했다. 2개월 만에 선교사를 파송했다. 자신의 월급을 털어 선교사를 돕는 걸 즐겼다. 현재까지 세계 각국에 1220명의 선교사를 파송했다.

91년 교회의 새로운 변신을 꾀했지만 간경화 판정을 다시 받고 안식년을 얻어 하와이로 떠났다. 그리곤 ‘성령목회’라는 콘셉트를 갖고 되돌아와 ‘성령이여 오소서’라는 주제로 성령집회를 열었다. 동생 하스데반 선교사와의 동역을 통해 경배와찬양 문화를 한국교회에 널리 보급했다. 온누리교회 또한 폭발적 성장을 이어갔다. 94년 ‘2010년까지 2000명의 선교사와 1만명의 평신도 사역자를 세운다’는 ‘2천/1만’ 비전을 선포한 데 이어 2003년에는 ‘사도행전적 교회를 재생산해 온누리에 복음을 전한다’는 Acts29 비전을 발표했다.

그는 설교에 유난히 집착했다. 설교를 하지 않으면 죽는다고 고백했다. “성경이 말하게 하라” “성경의 순서를 따라라” “네가 성경 본문을 택하지 말라”는 강해설교 원리를 철저히 따르려 했다. 하 목사는 대형 교회를 꿈꿔본 적이 없었다. “사람이 만드는 게 아닙니다. 오늘의 온누리교회는 상상도 못했어요. 모든 게 하나님 작품입니다.”

그는 모든 교회의 부흥에 관심이 있었다. 한국교회의 진정한 부흥은 중소형 교회에 달려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온누리교회의 국내 성전과 해외 비전교회들이 중소형 교회의 모델이 돼주길 바랐다. 중소형 교회들이 온누리교회의 도움을 받기 원하면 얼마든지, 언제든지 도울 용의가 있다고 늘 말해 왔다.

함태경 기자 zhuanji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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