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 옛 그림] (83) 참외 버리고 호박 먹으랴 기사의 사진

물 좋은 채소와 과일이 아가리 널찍한 쟁반에 담겨 있다. 통 굵은 수박은 밭에서 금방 따온 듯 건실한 윤기가 흐르고, 가지 두 개는 꼭지가 오돌토돌한 게 싱싱하다. 참외는 선명하게 골이 졌고 겉이 유난히 단단하다. 오른쪽 구석에 있는 세 개가 뭘까. 꼭지로 봐선 감이나 토마토에 가깝다.

18세기 초 선비화가인 윤두서의 산뜻한 그림이다. 수채화로 그린 서양 정물화라 해도 깜박 속겠다. 소재를 배치해 놓은 거나 사실적인 형상이 화가의 의도를 살렸다. 명암과 입체감이 또렷한 붓질은 흔하고 낡은 옛 그림의 법식과 다르다. 윤두서는 관념보다 사물의 실질을 아꼈다. 당연히 서양화 기법을 눈여겨봤을 테다. 앞서 간 화가의 재바른 실험작인 셈이다.

그림에 나온 소재의 상징성은 모호하다. 서로 이어붙일 거리가 궁색한 탓에 그저 감상용 정물로 보는 게 나을 성싶다. 재미삼아 떠오르는 건 과일이나 채소를 등장시킨 속담들이다. 감이든 토마토든 먹는 철이 다를 뿐 둘은 사촌지간이다. 토마토는 ‘한해살이 감’이라 해서 ‘일년감’으로 불렀다. ‘감 고장의 인심’은 감이 흔해 따먹어도 나무라지 않는 인심을 말한다.

수박 겉핥기는 섣부르다. 수박은 속을 봐야 알고 사람은 지내봐야 안다. ‘가지 따먹고 외수(外數)한다’는 남의 가지를 훔치고 딴전 부리는 짓이다. 가지 나무에 목매면 가릴 처지가 아닌 딱한 꼴이다. 외 덩굴에 가지 열릴까마는 외 거꾸로 먹어도 제 재미라 했다. ‘참외 버리고 호박 먹는다’는 알뜰한 아내 내쫓고 못난 첩 들여놓은 사람을 욕하는 말이다. 화가는 제 흥에 겨워 그려도 보는 이는 제 말을 지어낸다. 먹는 그림 맛이 다 다르다.

손철주(미술칼럼니스트)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