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순만 칼럼] 대피소와 철조망을 울리는 음악 기사의 사진

“임진각이 대립을 해소하는 지구촌의 새로운 코러스 명소가 되었으면 한다”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는 음악축제의 명소가 있다. 뉴욕 최정상 음악 그룹이 매년 여름 야외 무료음악회를 여는 센트럴파크, 여름이면 도시 전체가 축제장으로 변하는 잘츠부르크(오스트리아)·에든버러(영국)·바이로이트(독일) 같은 곳들이다. 1990년대 이후에는 로마 황제 카리칼라가 지은 노천탕 유적지,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의 무대인 베이징 자금성도 명소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카리칼라 노천탕은 1990년 7월 세계 3대 테너로 꼽히던 루치아노 파바로티(작고),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가 이탈리아 월드컵 전야제 때 처음으로 합동무대를 꾸민 곳이다. 스페인 마드리드 출신인 도밍고와 카탈로니아 지역 출신인 카레라스는 앙숙이었다. 1987년 백혈병을 앓고 있던 카레라스는 미국에서 항암치료와 골수이식을 하느라 재산이 바닥 난 상태였다. 그때 마침 마드리드에 백혈병 환자를 돕는 재단과 백혈병 전문병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그곳에서 무료로 치료를 받아 건강을 회복했다.

무대로 돌아온 카레라스가 재단에 보답하고자 후원 회원으로 등록하려고 찾아갔을 때 사실은 그 재단이 도밍고가 카레라스를 돕기 위해 설립한 것이며, 카레라스의 자존심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익명으로 운영해왔다는 것을 알게 됐다. 깊은 감동을 받은 카레라스는 곧바로 도밍고의 공연장을 찾아가 관객들이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고 깊은 감사를 드렸다. 도밍고는 카레라스를 힘껏 껴안았고 이 우정은 스리테너의 합동무대라는 역사적 공연으로 발전했다.

올해 광복절날 저녁 임진각 평화누리 야외공연장에서 다니엘 바렌보임이 지휘하는 웨스트-이스턴 디반(West-Eastern Divan) 오케스트라의 평화콘서트가 열렸다. 유대계 바렌보임이 팔레스타인계 석학인 에드워드 사이드(1935∼2003)와 함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비롯해 중동지역 젊은이들을 모아 설립한 교향악단이 지구촌 유일의 분단국인 한국을 찾아 분단 현장인 임진각에서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연주한 것이다.

4악장에서 소프라노 조수미, 메조소프라노 이아경, 테너 박지민, 베이스 함석헌이 연합합창단(국립합창단·고양시립합창단·서울모테트합창단)의 코러스에 맞춰 ‘환희의 송가’를 연주할 때, 임진각이 지구촌 또 하나의 음악회 명소가 되었으면 하면 바람 간절했다. 이·팔의 대피소를 흔들었던 음악이 꼬일 대로 꼬인 남북의 철책선을 흔드는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었으면 했다.

웨스트-이스턴 디반은 명성이 그리 높은 오케스트라는 아니다. 재원도 없고 역사도 일천하다. 단원들이 같은 생각을 공유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팔 출신의 단원들은 남북한 못지않게 갈등에 길들여진 세대의 후예들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어떤 사이인가. 누천년에 걸친 앙숙이요, 2차대전 이후 영토 전쟁이 잠시도 그치지 않는 사이다. 중동관계가 악화될 때는 단원들이 함께하는 것도 매우 힘들어한다고 한다. 그런 미움이 오래 화음을 맞춰가는 과정을 통해 서서히 사라져가고 다른 의견을 받아들이는 성숙함으로 발전해 가는 것이다.

분쟁지역을 찾아다니는 바렌보임은 지금까지 763개의 검문소를 통과했다고 한다. 올 5월 가자지구에 들어갈 때는 이스라엘의 반대 때문에 유엔의 후원을 얻어 이집트를 통해 들어가 연주했다. 음악은 대립을 해소해주지 못하지만 해소의 출발점이 되는 것은 가능하다. 현실은 냉엄하고 팍팍하고, 총구에서는 매운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대립의 현장에 음악 같은 것이 설 땅은 없다. 그러나 종당에 무장군인들의 가슴을 녹이는 것은 베토벤이다. 힘 자체가 없는 예술은 서로를 죽이는 무자비한 힘을 돌아보게 만든다. 도밍고와 카레라스가 그 힘에 의해 손을 잡았다.

팔레스타인 출신으로 세계 석학의 반열에 오른 에드워드 사이드는 “음악의 침묵이야말로 가장 큰 즐거움이며 정치적으로나 다른 면으로나 절망 가득한 곳에서 피어오르는 한줄기 희망”이라고 말했다. 그의 유작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서문에 나오는 말이다.

수석 논설위원 so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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