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곤 칼럼] 카다피 다음엔? 기사의 사진

무아마르 카다피의 42년 독재가 종언을 고할 즈음이다. 리비아 안에서 무소불위의 독재자였고 국제사회에서는 기고만장한 이단아였다. 죽기 전에는 결코 놓을 것 같지 않던 절대권력이 살아 있는 그의 손아귀에서 마른 모래알처럼 주르륵 빠져나가고 있다. 전투기와 헬기를 동원, 시위대를 향해 폭격과 기총소사를 하도록 명령했던 그 힘으로도 끝내 왕좌를 지켜내지 못하게 됐다.

독재자들은 권력을 행사하는 동안은 영웅처럼 행동하지만 그것을 잃어버린 다음에는 비열한 도망자가 된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그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자기 한 몸 겨우 누일 수 있는 구덩이에 숨어 있다가 미군에게 잡혔다. 카다피도 행방이 묘연해졌다고 한다. 국외 탈출설, 국내 은신설 등 추측만 무성할 뿐이다. 정말 기가 막히는 게 이런 경우다. 독재자들의 말로가 이처럼 지저분할수록 핍박받던 국민들의 고통은 더 커질 수 있다. “저 따위 인간에게 그처럼 벌벌 떨며 복종을 했다니!”

독재자들의 지저분한 末路

카다피가 숨어 있는 사이에 그의 아들들이 잡히거나 사살당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카다피는 필경 제 피붙이 모두를 죽음 혹은 감옥으로 몰아댄 다음에야 도망가든 붙잡히든 할 것이다. 자식들에게 불의한 권력을 나눠준 대가다. 자식을 불의하게 가르친 갚음이다. 독재자는 이렇게 망한다. 다만 그 때문에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크다는 게 억울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지만.

이 시간 또 한 사람의 세기적·세계적 독재자 김정일이 시베리아 동부 도시 울란우데에 도착해서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기다리고 있다. 아마 경제 지원을 호소하는 회담이 될 것이다. 김정일은 이처럼 중국으로, 러시아로 다니면서 독재 비용 구걸하기에 안간힘을 쓴다. 안으로는 전제군주적 통치를 계속하면서 밖으로부터의 지원으로 자신의 권력을 보강하겠다는 생각은 어리석다. 손 벌리는 창피를 남에게서 당하느니 자신의 인민들에게 사죄하는 부끄러움을 감수하는 게 더 낫다. 살 길은 안으로부터 열린다. 이건 상식이다.

인류사회는 전체주의적 통치 구조를 가진, 이른바 ‘공산체제’들을 지난 세기 말에 거의 다 청산했다. 그것은 이념의 문제 이전에 인간조건의 문제였다. 인민을 노예로 전락시킨 정권은 붕괴될 수밖에 없다. 독재자들이 휘두르는 권력은 반드시 인민에게 몰수된다. 이것은 인류사회의 철칙이다.

독재비용 구걸 나선 김정일

아직까지 북한 주민들이 전면적 봉기를 하지 않고 있는 것은 북한 체제가 강고해서라기보다는 주민이 권력의 마취에서 미처 깨어나지 못한 때문일 것이다. 김씨 일가의 신격화, 군사력의 과시 및 행사, 잔혹무비의 처형과 배제 등이 북한 주민들을 울타리 안에 (자발적으로) 가둬놓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러나 역사의 눈으로 보면 이는 잠시 동안의 악몽일 뿐이다. 이윽고 각성한 인민은 압제의 울타리를 걷어내고 독재자를 처형대에 세운다. 영화 ‘아일랜드’의 마지막 장면들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바가 그것이다.

리비아인들의 용기에 존경과 찬사를 보낸다. 인간의 존엄을 스스로 구현하고 확인시켜줬기 때문이다. 수많은 희생자들에게는 깊은 애도를, 유족들에게는 마음을 다한 위로를 드리고 싶다. 리비아 국민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고귀한 희생을 감내했으므로.

좀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해 버리자. 보수대학생단체들이 지난 20일 서울시청광장에서 북한인권문화제를 열었다. 그런데 민주노총 등 희망시국대회 시위자들이 학생들의 행사를 집요하게 방해했다는 보도다. 물론 행사를 위한 자리다툼이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우리 사회에선 어느 때부터인가 북한 정권 역성들기가 ‘진보적 유행’이 되다시피 했다.

진보 세력의 리더를 자처하는 분들, 2천 수백만 명의 겨레붙이들이 권력의 횡포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는데도 권력자들 감싸주기에 여념이 없다. 사회적 약자의 편, 서민의 편에 서 있다고 외치는 분들이 북한에 대해서는 권력자 편에 당당히 서 있다. 이걸 모순이라고 하면 시세를 잘못 읽는 얼치기 수구세력의 일원이 되고 마는 것인가? 세상 참….

논설고문(경희대 객원교수) jingon@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