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궁의 사계] 경희궁의 고추밭 기사의 사진

여름이 가을에게 바통을 넘겨주는 계절. 노염(老炎) 속에 고추가 영글어간다. 채전밭은 햇살과 바람의 변주로 감미롭고, 고추는 매일 조금씩 붉은색을 칠하며 결실로 치닫는다. 저 평화로운 농경의 현장은 어디일까. 서울 도심의 경희궁이다. 궁궐을 돌보는 사람이 없기에 고추를 심을 수 있다.

경희궁은 한때 당당한 궁궐이었다. 광해군 9년에 창건된 이후 10대에 걸쳐 임금이 거처한 곳이다. 7만2800평 부지에 정전과 동궁, 침전, 별당 등 99동의 건물을 거느렸다. 북궐인 경복궁, 동궐인 창덕궁과 짝을 이루며 서궐로 불렸다.

훼손의 주역은 일제였다. 궁터에 학교를 짓고 전각은 팔아넘겼다. 정문 흥화전은 이토 히로부미 사당인 박문사의 정문으로 사용할 정도였다. 일제가 물러가도 경희궁은 광복의 기쁨을 누리지 못했다. 서울시가 경희궁터의 주인이 됐으나 황성옛터처럼 방치하고 있다. 반짝이는 고추가 그리 반갑지 않은 이유다.

손수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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