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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시각-박정태] 부득탐승(不得貪勝)

[데스크시각-박정태] 부득탐승(不得貪勝) 기사의 사진

불과 만 11세에 프로에 입문한 이창호(36) 9단은 한국 바둑을 명실공히 세계 최강으로 이끈 인물이다. 물론 스승인 조훈현 9단이 초석을 놓은 데 힘입은 바 크지만 이창호는 스승을 뛰어넘어 최연소 국내·세계 타이틀 획득, 세계 6대 기전 그랜드슬램 달성 등 온갖 신기록을 세우며 세계를 평정한 불멸의 승부사다.

지금은 한국 바둑 랭킹 1위인 이세돌 9단 등 상대적으로 젊은 기사들에게 밀려 ‘무관의 제왕’이 됐지만 이창호야말로 한국 바둑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국보(國寶)임에 틀림없다. 이창호는 원래 말수가 적어 심중을 알 수 없다는 평이다. 그런 그가 30년 외길 인생을 통해 얻은 깨달음 등을 담은 자전 에세이를 최근 펴냈으니 팬들로서는 반갑기 그지없겠다. 책 제목은 ‘이창호의 부득탐승(不得貪勝)’.

바둑 둘 때 명심해야 할 10가지 계명, 즉 바둑 십계명인 ‘위기십결(圍棋十訣)’의 첫 번째 항목이 부득탐승이다. ‘승리를 탐하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는 뜻의 부득탐승은 욕심과 집착을 버리라는 말이다. 집착은 눈을 흐리게 한다. 마음을 비워야 한다는 얘기다.

위기십결에는 ‘버리라’는 계명이 유독 많다. 사소취대(捨小取大·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취하라) 봉위수기(逢危須棄·위기가 닥치면 과감히 돌을 버려라) 등이 그것이다. 우리 인생사에도 적용되는 삶의 경구다. 채우려면 먼저 비워야 한다. 독일 출신 작가인 미하엘 코르트는 행복을 위한 기본 조건이 비움이라고 했다. 우리를 얽매는 ‘채움’이 아니라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비움’의 삶이 바로 행복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흔히 바둑을 인생의 축소판이라 한다. 매순간 선택의 기로에 서야 하고, 변화무쌍해 앞길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흥망성쇠와 희로애락도 담겨 있다. 바둑은 흑·백이 정수(正手)를 찾아나가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래야 조화와 균형이 유지된다. 그 과정에서 의외의 수가 나오는 경우도 허다하다. 묘수도 무궁무진하다. 장고 끝에 악수도 나온다. 자충수를 두기도 한다. 불리해지면 무리수도 둔다. 승부수도 던진다. 상대를 속이기 위한 꼼수나 정석에 없는 암수(暗手)도 있다. 암수는 변칙수, 함정수의 일종. 그렇지만 사술(詐術)을 자주 쓰는 사람은 오래가지 못한다. 정도(正道)를 걸어야 하는 이유다.

그런데 사회 곳곳에는 무리수, 자충수, 암수가 횡행한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과 곽노현 서울시교육감 사태는 무리수와 자충수가 낳은 결과물이다. 오 전 시장이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무상급식 주민투표를 강행한 것은 대세의 흐름을 거스르는 무리수였다. 일각에선 잃은 것보다 얻은 게 많은 승부수라고 평가하지만 과연 그럴까. 여야의 열성 지지층을 제외한 중도층을 흡수해야 하는데 몽니를 부렸다는 느낌이 강한 그의 모습에 중도층이 손을 들어줄 것인가.

곽 교육감이 지난해 교육감 선거의 진보진영 후보 단일화 대가로 사후에 거액을 줬다는 의혹, 이게 사실이라면 자충수다. 높은 도덕성이 요구되는 교육계 수장이 어떤 형태로든 부패 사슬에 연루된 점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책임지는 것도 당연하다. 오 전 시장은 여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정공법을 택해 조기 퇴진으로 매듭지었는데 곽 교육감은 사퇴를 거부한단다. 꼼수를 부리는 꼴이다.

엊그제 국회가 여대생 성희롱 발언 파문을 일으킨 무소속 강용석 의원 제명안을 부결시킨 것은 전형적인 암수에 속한다. 방청객과 취재진을 내쫓고, 국회 문을 걸어 잠그고, 국회방송 중계 모니터도 꺼버린 채 비공개 본회의를 통해 ‘희희낙락’하며 동료 의원을 구제한 놀라운 수법. 온 국민을 농락한 대한민국 국회의 현주소다.

선거의 계절이 돌아왔다. 국민들이 정신 차려야 할 때다. 암수에 능한 정치인들도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창호의 말에 귀 기울여보자. “순간의 결함만 때우는,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미봉책을 사용하면 언제나 패착으로 귀결된다.”

박정태 문화생활부장 jtpar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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