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탁석산의 스포츠 이야기] 조연이 때로는 묵직한 감동을 준다 기사의 사진

무협지의 재미는 주인공이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결국에는 악을 물리쳐 뜻을 이루는 데 있습니다. 주인공은 처음에 시련에 처하게 되지요. 부모님의 죽음, 추방, 험한 수련 과정 등. 하지만 인고의 노력 끝에 악당을 꺾습니다. 선과 악을 빼고 보면 이런 구조는 약자가 노력하여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던 강자를 꺾는 것입니다. 보통 악당은 무공이 뛰어난 강자이고 주인공은 정의감에 불타나 약자인 것이지요.

스포츠도 마찬가지로 생각됩니다. 스포츠의 감동도 약한 팀이 천신만고 끝에 승리하는 데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누구나 약팀으로 여겼으나 기적적인 우승을 거둔다면 감동이 몇 배가 되는 것이지요.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 팀이 강호를 연파하고 4강에 올랐을 때 우리는 얼마나 기뻐했습니까. 반대로 객관적인 전력이 강한 팀이 성적을 내지 못하면 비난이 쏟아집니다. 요즘 SK야구단이 이런 처지일 겁니다. 이만수 감독 대행 체제 이후 4승10패 정도를 거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선수 구성에 별 변화가 없고 잘 나가던 팀이라서 2할대의 승률은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지요. 강자가 약자가 되면 감동이 아니라 비난이 있을 뿐입니다.

무협지든 야구팀이든 우리는 주연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야기 전개가 주연을 중심으로 펼쳐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극적인 장면에는 주인공들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베이징 올림픽 야구 우승에도 주역이 있었지요. 이승엽, 윤석민 등입니다.

그런데 여기 가슴을 꽉 채우는 조연이 있습니다. 이번 달 18일 은퇴하는 넥센의 이숭용 선수입니다. 1994년에 데뷔해 지금까지 한 팀에서만 뛰었습니다. 팀은 태평양, 현대, 히어로즈, 넥센으로 바뀌었지만 늘 같은 자리에 있었습니다. 통산 타율도 0.281로 높은 편입니다. 현대 시절에는 우승도 몇 차례 해봤지만 그는 자신을 조연이라고 말합니다. 평생 타이틀 한번 획득한 적이 없고 화려한 조명을 받았던 적도 없었던 것이지요. 주연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늘 성실하게 한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조연은 주연이 아닙니다. 하지만 주연 혼자의 힘으로 무협지에서 복수가 완성되는 것도 아니며 주연 혼자 역전승을 이끌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성실하고 말이 없는 든든한 조연들이 없다면 우리가 열광했던 승리도 없었겠지요.

그런데 왜 하필 18일에 은퇴할까요? 아시겠지만 18일에 출전하면 단일팀에서 2000번째 게임에 출전하는 날이 되기 때문입니다. 대단한 기록입니다. 화요일 게임을 보니 대타로 나와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나더군요. 은퇴하는 날에는 깨끗한 안타로 마지막을 장식하길 바랍니다. 하지만 삼진이라도 진심으로 축하를 보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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