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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시] 파 할머니와 성경책


최동호(1948 ~ )

추석 대목 지나 발걸음

한산한

돈암동 시장 골목길

느른한 정적이 감도는 하오,

검은 가죽 표지

성경책 바로 옆에 펼쳐 놓고

파뿌리처럼 쓰러져 잠든 할머니

대문짝 활자가

돋보기안경에 넘칠 만큼 가득해,

앙상한 팔다리 웅크린

할머니, 하늘의 품에

안겨, 기도하다 잠든 아기처럼 포근하다


한적한 오후 재래시장의 한 모퉁이. 파를 파는 할머니가 성경을 펴놓고 읽다가 잠이 들었다. 평온하고 작은 그림이다. 그러나 이 작은 그림을 한껏 확대시키는 것이 있다. 검은 가죽 표지와 파뿌리처럼 하얀 할머니. 불변하는 성(聖)과 변화하는 속(俗)을 대비시킨다. 활자는 웅크린 앙상한 팔다리 속으로 스며들어 대문짝만하게 넘쳐흐른다. 하늘의 품이 펼쳐진다. 할머니는 아기로 돌아간다. 천국은 그의 것이다.

임순만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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