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엄상익] 합의를 매수로 보는 美검사의 정의관 기사의 사진

9월의 한 주일 동안 캘리포니아 형사법원의 한 법정에서 폭행사건을 심리하는 과정을 지켜봤다. 한국인끼리 아파트 주차장에서 주먹다툼을 했다가 화해를 하고 끝낸 사건이었다.

미국 법정은 의외였다. 담당검사는 대형 스크린에 싸움이 녹화된 CCTV 장면을 보이면서 피해자라는 남자를 불러내어 동작 하나까지 질리도록 묻고 또 물었다. 그가 가해자를 용서하겠다고 하자 검사는 분노했다. 가해자가 피해자를 몰래 만나 매수한 것 같다고 의심했다. 한국에서는 싸웠을 경우 사과하고 합의금 명목으로 돈을 주기도 한다. 미국 검사는 그런 걸 법 기능을 해치는 악적인 존재로 보는 것이다. 관점이 전혀 달랐다. 미국 법정은 인권보다 사회가 조그만 폭력에도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강한 의무감을 가지고 있었다.

엉뚱한 광경이 일어나고 있었다. 피해자는 어떻게든 그를 때린 한국 청년을 감싸려고 했다. 검사나 판사는 그들보다 현장상황을 파헤치는 데 치중했다. 건물관리인이 증언대에 올라 경찰을 부르게 된 경위를 한참 말했다. 출동했던 경찰관들이 현장에서의 행동 하나하나를 설명했다. 의사도 불려와 혹독한 신문을 받았다. 정상 증인들도 출두했다. 주먹을 휘두른 청년이 평소 착하다는 걸 말해주기 위해서였다. 이웃의 의사와 교수 그리고 한국 외교관도 있었다. 한국 같으면 탄원서 한 장으로 끝났을 것이다. 미국 법정은 달랐다. 검사는 대형화면에 입술이 터져 피가 묻은 피해자의 사진을 보게 하면서 이래도 착하다는 당신의 인식을 유지하겠느냐고 되물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몇날며칠 재판이 진행됐다. 검사는 징역 5년을 구형했다. 폭력범을 추방하기 위해서는 이민국 시설에 2년을 더 가둬두니까 실질적으로 징역 7년이 될 수도 있는 셈이다. 한없이 느슨해 보이던 미국의 다른 면이 들여다보이면서 소름이 끼쳤다. 법망에 걸려들면 뼈도 추리지 못할 것 같았다.

LA의 한국총영사는 현재 감옥에 있는 한국인이 200명을 넘어선다고 했다. 그 중에는 33년째 징역을 사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다양성 사회를 유지하는 건 철두철미한 법의 지배였다. 사회의 공공질서를 지키기 위해 미국의 사법부가 투자하는 비용과 에너지는 엄청난 것 같았다.

우리사회의 공적인 사법정의는 어떨까? 개인의 이익에는 바늘 끝보다 민감해도 사회가 입는 피해에는 바위보다 더 둔하다. 국가가 피해자인 탈세는 피해자가 없는 것으로 인식한다. 무고죄를 다루는 정년이 1년 남은 형사의 지독한 무감각을 본 적이 있다. 개인이 피해를 당한 게 없는데 자기가 왜 수사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고소인을 불러 다그쳤다. 무고죄가 국가심판기능의 적정한 행사를 방해한다는 형법의 기본조차 몰랐다.

부장판사였던 문흥수 변호사는 법원 재직시 사법개혁의 기수였다. 그는 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10건을 고소하면 2건 정도만 기소되는 현실을 개탄했다. 사법연수원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오랜 세월 법관을 한 그가 법 실력과 경험이 부족해서 잘못 고소한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문 변호사는 검찰 출신의 변호사에게도 그런 현실에 대해 물어보았다고 했다. 그 역시 고소를 해도 기소를 하지 않는 검찰의 보신주의를 원망하더라는 것이다. 10건을 고소해서 2건이 기소되는 상황이면 사법정의는 20% 정도밖에 실현되지 않는 것이라고 그는 평가했다. 형사나 검사가 고소를 시큰둥하게 생각할 때 사회정의는 실종된다.

문 변호사는 법원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억울해하는 사람들이 제기하기 마련인 민사소송에서 승소확률이 반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의미는 지는 절반 중에 가슴에 멍이 드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법원의 보수주의가 그 배경에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이다. 손에 잡힐 듯 확실하지 않으면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면이 더 크다.

직접 피해자가 아닌 사람이 함께 분노해야 정의가 이루어지는 사회다. 솔론의 말이다.

엄상익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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