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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꿈 ‘셰프’… 가수 김조한의 가족 그리고 음악

어릴 적 꿈 ‘셰프’… 가수 김조한의 가족 그리고 음악 기사의 사진

가수 김조한(38)이 신곡을 발표한 다음날 그를 서울 여의도에서 만났다. 음악보다는 가족에 대해 물을 참이었다. 알려진 건 2000년대 후반 부모를 잇따라 잃었고, 가창 경연 방송에 출연 중인 아빠에게 힘내라고 노래를 불러주는 딸이 있다는 것 정도였다. 1993년 그룹 ‘솔리드’로 데뷔하고 최근까지 18년간 그의 입에서 나온 가족사는 한 줌이 안 됐다. 그 한 줌의 이야기로 보기에도 가족은 그의 음악과 삶을 지탱하는 힘인 듯했다. 무엇보다 그가 그런 가족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은 이유가 궁금했다.

-음악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준 사람이 아버지라고 들었습니다.

“자식들을 연주자로 키우려는 꿈이 있었어요. 큰누나는 피아노, 둘째누나는 바이올린, 작은누나는 첼로를 했어요. 저는 바이올린을 6년 했어요. 모여서 레슨 받고, 교회에서 연주도 했지요. 이유는 몰랐어요. 제가 12살에 그만둔다고 했어요. 많이 혼났어요. 6년간 돈 버렸다고. 그러면서 얘기하시더라고요. ‘나는 음악을 하고 싶었지만 어릴 땐 기회가 없었고, 지금은 나이가 많아서 할 수 없다’고.”

김조한은 신인으로 보일 만큼 공손했다. 부모를 ‘아버님’ ‘어머님’이라고 높여 지칭하기도 했다.

-아버지도 음악에 소질이 있었나요.

“교회에서 테너였는데 항상 목소리가 다른 분이랑 다르게 트여 있었어요. 목소리가 얼마나 좋은지, 치매 걸려서 병원에 계실 때 혼자 노래를 불렀는데 너무 아름다워서 모든 간호사가 몰려갔대요.”

-부자(父子)가 닮았습니까.

“역시 목소리는 물려받지 않았나 생각해요. 또 정말 멋있었어요. 저랑 비슷하게 생기지 않았어요. 약간 알 파치노(영화배우)처럼 생겼어요. 영화 ‘대부’의 주인공처럼. 저는 좀 엄마 닮았어요.”

김조한은 2남 3녀 중 막내다. 부모는 그를 낳기 전 4남매를 데리고 미국에 갔다. 큰딸을 피아니스트로 키우기 위해서였다. 처음엔 오토바이 수리점을 했다. 업종은 도넛 가게 등으로 몇 번 바꿨다.

“1998년 솔로 1집 녹음 때문에 LA(로스앤젤레스) 집이랑 라스베이거스를 오갈 때였어요. 아버님은 골프 치고 아침 9시까지 돌아오는데 그날은 한 시간 넘게 안 왔어요. 기다리다 출발했는데 계속 찝찝한 거예요. 다시 와 보니까 집 근처에 큰 교통사고가 났더라고요. 거기 아버님이 있었어요.”

60대 후반의 아버지는 그 뒤로 치매를 앓았다. 김조한이 한국에서 음반 활동을 하고 6개월 만에 돌아왔을 땐 아들도 알아보지 못했다. 김조한은 “낚시를 가르쳐 준 게 아버님이었는데 낚싯대를 쥐어주고 사용법을 알려드렸지만 아무것도 못하고 보기만 하셨다”고 말했다. 그는 말이 빨라졌다.

“많이 슬펐어요. 당시만 해도 제가 한국말을 잘 못했기 때문에 대화도 제대로 못 했어요. 영어로 대화했어요. 아버지 영어는 제 한국말보다 훨씬 짧았죠. 한국말을 좀 더 빨리 배웠으면 대화도 많이 나눴을 텐데. 제가 한국말을 배웠을 땐 이미 치매에 걸리셔서 대화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어요.”

아버지는 아내와 ‘가수 김조한’만 기억했다. 가수 김조한을 찾으면서 아들인 건 몰랐다. 아내가 “왜 김조한을 좋아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나한테 잘했던 가수”라고 말했다. 2008년 눈을 감았다.

“힘들 때마다 항상 그 생각이 나서 이 일(음악)을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어요. 당시에 어머님은 아버지가 저를 못 알아보는 게 너무 화가 나셨나 봐요. ‘얘가, 얘가 조한이라고!’”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한 해 먼저 세상을 떴다. 당뇨 합병증으로 투병 중이었다. 김조한은 최근 방송에서 노래할 때 어머니 생각에 사로잡혔다고 했다. 그는 손으로 눈앞의 허공을 쓱 훑으며 말했다.

“사진들이 이렇게 눈앞을 지나갔어요, 스틸 사진처럼. 피하고 싶어서 고개를 돌려도 사진이 생기고요. 저는 저한테 얘기했어요. ‘조한아, 김조한! 너 지금 방송 중이야. 정신 차려.’ 감당이 안 됐어요.”

-어떤 분이었나요.

“마음은 약하지만 정말 힘이 셌던 여자였어요. 애들 4명을 미국에 데리고 와서 혼자 다 키웠어요. 일을 너무 많이 해서 몸이 일찍 상했어요. 당뇨가 90년대 초부터 심해졌어요. 눈이 멀게 됐죠.”

그 무렵 김조한은 친구 정재윤 이준과 솔리드로 데뷔했다. “그 덕에 어머님께 수술을 해드릴 수 있었다. 가수하길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고 그는 말했다. 이제 화제를 솔리드 시절로 돌렸다.

-당시 ‘음악 하러 한국에 왔다’고 했습니다. 모두 재미교포였고 알앤비(R&B)라는 음악도 생소했는데 미국에서 활동하는 게 낫지 않았습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미국엔 라인(줄)이 없었어요. 저는 사실 한국말 못 하니까 안 맞을 것 같았어요. 그래도 왔더니 너무 힘든 거예요, 언어 때문에. 지금도 언어 얘기는 가끔 나오잖아요.”

-어릴 때 집에서 한국말을 안 가르쳤나요.

“제가 안 해서 그렇죠. 형제 중에 제일 못 했어요. 형제들하곤 집에서도 다 영어로 했어요. 제가 애틀랜타에서 태어나 중학교까지 다녔는데요, 그땐 한국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학교에 학생이 3000명 넘었던 것 같은데 동양 사람이 저밖에 없었고요. 그땐 좀 위험했어요. 질 안 좋은 백인들이 동양 애 잡아서 죽이기도 하고요, 지나가면서 욕하는 차도 많았어요. 그래서 적응하면서 살려고 했었죠.”

-지금은 발음이 좋은 편인데요.

“제가 얘기하는 걸 녹음해서 들으면 짜증나요. 내 생각엔 이것보다 발음이 좋은 것 같은데.”

솔리드 1집 활동은 방송 출연 두 번으로 끝났다. 2년 후 돌아온 솔리드는 ‘이 밤의 끝을 잡고’로 벼락 스타가 됐다. 잘나가던 그들은 4집 활동을 마친 97년 7월 돌연 해체를 선언한다. 이유는 “음반시장 불황으로 판매가 부진하고, 댄스음악 중심의 가요 풍토에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라고 밝혔었다.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닙니까.

김조한은 고개를 숙인 채 한참 침묵했다. 한숨을 몰아쉴 듯한 분위기였다. ‘말하기 어려우면 넘어가자’고 하려는데 그가 입을 뗐다.

“있었죠. 프라이버시를 위해서 제가 다 말할 순 없지만 여러 가지 힘든 부분이 있었어요. 좀 아깝지만 당시엔 맞았던 선택 같아요. 우린 지금도 친구고, 계속 만나요. 셋 사이엔 문제가 없었거든요. 한국 와서 그렇게 고생했는데, 단순히 누가 ‘그만하자’고 했다고 끝낼 사람들은 아니었어요.”

그는 솔리드 해체 직후인 97년 11월 세 살 연상 나상원씨와 결혼했다. 나씨는 이화여대를 나온 미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솔리드 2집에 넣으려다 만 작곡가 김형석의 곡에 가사를 붙였었다.

“소개해준 김형석씨가 녹음하는 날 안 왔어요. 그래서 노래는 못 하고 그냥 짧은 한국말로 계속 얘길 했죠. 그때 전 한국에 친구도 한 명 없었거든요. 한 3년 알고 지내다 자연스럽게 결혼했어요.”

-지금도 가사를 써주나요.

“아뇨. 그때 딱 한 번…. 사실 (가사가) 그렇게 좋진 않았어요.” 김조한은 웃었다. “내가 보기엔 형석이형이 그날 안 온 게, 가사가 안 좋아서 피했던 것 같아. 가사를 못 썼다고 직접 말은 못하고.”

외동딸 리사(8)는 초등학교 3학년이다. 김조한은 “딸이 아빠를 제일 좋아한다”고 말했다.

“아빠를 막 찾을 때가 된 것 같아요. 엄마는 항상 옆에 있으니까. 생긴 건 아닌데요, 생각하는 게 저랑 참 비슷해요.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고맙고, 그게 딸이라는 게 신기해요. 더 잘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표현을 안 하면 오해가 생길 수 있잖아요. 전 그런 게 많았어요.”

-오해를 많이 받았다는 건가요.

“어릴 땐 수줍어서 말도 잘 못했어요. 물건이 고장나면 제가 뒤집어썼어요. 안 했대도 믿지 않고. 그래서 어린 마음에 하나님을 알게 된 것 같아요. 내 마음을 아는 건 하나님밖에 없을 테니까요.”

-그동안 가족 이야기는 일부러 감춘 건가요.

“숨겼던 것보다 음악에 집중하고 싶었어요. 가족을 막 오픈(공개)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거든요. 제가 집에서도 가수는 아니잖아요. 그래서 (가족 얘기 안 하고) 조용히 있는 게 좋았던 것 같아요.”

그는 “평소 예쁜 음악을 찾는 편”이라며 “슬픔 뒤에 희망이 있는 노래가 좋다”고 했다.

“슬픔으로만 끝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희망이 없으면 이 직업 하면 안 되죠. 저는 인생을 그렇게 살아요. 아무리 큰일이 있어도 내일은 좀 달라지겠지. 그걸 우리가 보여주지 않으면 누가 보여줘요. 어릴 땐 자극적인 음식 찾고, 나이 들어선 내용 좋은 음식을 찾죠. 음악도 인생도 그래요.”

-음악을 음식에 자주 비유하는군요.

“어릴 때 셰프(주방장)가 되고 싶었어요. 다들 맛있다던 어머니 손맛을 제가 물려받았어요. 솔리드 때 제가 음식 거의 다 했어요. 진짜 크고 좋은 부엌을 갖는 게 꿈이에요. 스테인리스로 싹 두른.”

글 강창욱 기자·사진 최종학 기자 kcw@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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