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전정희] 구렁이에 감긴 처녀 기사의 사진

‘절망이 제 가던 길을 멈춘다./ 고통이 제 가던 길을 멈춘다./ 독수리가 제 비행을 멈춘다./ 열망의 빛이 흘러나오고…’(2011 노벨문학상 수상자 트란스트뢰메르 시 ‘미완의 천국’ 중에서)

올해 노벨문학상 후보에 시인 고은은 거론되지 않았다. 작년까지 꾸준히 후보로 올랐다는 소식이 돌았다. 한류가 기세를 떨치고 있으나 묘하게도 노벨상과는 인연이 없다.

노벨문학상은 평가 관점이 다분히 서구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갖는 한(恨)의 정서를 그들은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몸속에 녹아든 그 뿌리 깊은 내면, ‘아’ 다르고 ‘어’ 다르게 표현하는 우리네 텍스트 독해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텍스트는 ‘죄와 벌’ 그리고 ‘구원’이다. 기독교 세계관이다. 아주 담백하다. 트란스트뢰메르의 시(詩)도 이 구원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낙원을 만드는 일, 낙원으로부터 구원 받는 성스러운 과정이 문자로, 이미지로, 닷(dot)으로 고백되는 것 말이다. 이 성스러운 과정에 사랑의 체온을 불어넣는 행위가 서구 예술의 극작술이 아닐까 싶다.

우리 현대소설 가운데 구원의 문제를 ‘기독교적’ 관점으로 다룬 작품이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 김동리의 ‘무녀도’, 박화성의 ‘한귀’ 등이다.

죄와 벌, 저주와 실성

한센병 환자가 사는 소록도병원을 무대로 펼쳐지는 ‘당신들의 천국’은 신임 조 원장과 원생들의 갈등을 다뤘다. 조 원장은 낙토(樂土)로 만들기 위해 역사(役事)를 밀어붙이고 그 가운데 온갖 고난이 따른다. 그리고 조 원장은 원생을 향한 사랑의 전지전능자가 되어 끝내 동상욕(銅像慾)이 생긴다. 전임 원장 또한 그랬다.

‘무녀도’는 ‘예수 귀신이 씌인’ 아들을 둔 무당 얘기다. 어미 무당은 “예수 귀신이 진짜인가, 신령님이 진짜인가”를 두고 밤 굿을 벌이고 끝내 비극으로 치닫는다. ‘한귀’는

농민들에게 숙명처럼 주어지는 장마와 가뭄을 두고 예수 신앙을 가진 이들과 아닌 이들의 대립을 그렸다. 크리스천 인텔리 농군 성섭은 하나님을 저주하고 실성해 버린다.

위와 같은 프레임은 한국적 구원 소설이 갖는 일반적 극작술이다. 작중 주인공은 대개가 구원받지 못하며 기독교에 대한 묘사는 평온한 전통의 침해이며 약탈이다.

보편적 가치 담아내는 예술

이것이 80년대까지 문학의 텍스트다. 한데 그러한 문법이 90년대 영화로 옮겨지면서 훨씬 그악스러워졌다. 영화 ‘밀양’에서 자식을 죽인 살인자에게 그 어미가 ‘나는 아직 당신을 용서하지 못하는데 너는 이미 하나님께 죄 사함을 받았다며 눈물을 흘리다니…’에서 느껴지는 삶의 부조리. 그 부조리의 귀결이 ‘죄’가 아니라 ‘크리스천’이다.

상영 중인 ‘도가니’도 죄나 구원의 문제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크리스천, 교회, 장로, 십자가 등이 부각된다. ‘보이는 것이 더 선명하게 보이도록’ 카메라가 움직인다. 구원은 없고 저주만 있다.

영화 ‘의뢰인’에선 딸을 죽인 사위를 향해 그 엄마가 “이놈이 사탄”이라고 외쳐도 누구 하나 귀담아 듣지 않는다. 교회 직분자여서다. 구원을 향한 열망은 이처럼 희화화된다. 예술은 저주의 굿판이 아니다. 인간이 갖는 본질, 베드로전서 1장 말씀처럼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의 구원의 확신에 시선을 두어야 한다.

구렁이에 감긴 처녀처럼 만들어선 보편적 가치를 논하는 세계적 문학이, 예술이 될 수 없다.

전정희 종교부장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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