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순만 칼럼] 겸양의 리더십 기사의 사진

국제영화제의 가장 큰 재미는 세계 각국의 영화들을 골라 보는 맛에 있다. 미국 프랑스 중국 일본 등 불과 몇 개 나라의 흥행작이 아니면 접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다양한 문화권의 수작 영화들을 골라보는 것은 국제영화제에서만 즐길 수 있는 낭만이다.

지난주 끝난 제16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70개국에서 출품한 300여 편의 영화가 선보였다. 안내 책자를 뒤적여가며 국내 영화관에서는 상영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영화를 고르는 것 자체가 여행 계획을 짜는 것처럼 설렘을 준다. 마침 고른 영화가 기대 이상일 경우, 방금 끝난 영화 속의 공간을 되새기며 차 한 잔을 나누는 시간은 더없이 충일한 경험으로 차오른다.

올해 부산영화제는 숙원이었던 ‘영화의전당’이 완공돼 영화제의 집중도가 높아진 것도 특기할 만하다. 해운대의 요지에 세워진 이 건물은 4개의 상영관과 야외극장으로 이루어진 복합문화공간이다. 폐막식 날 야외극장에 빗물이 새면서 전에 없이 부산시와 영화제조직위가 불협화음을 내고는 있지만, 부산영화제를 세계 유수의 영화제로 만들기 위해 지난 15년간 똘똘 뭉쳐온 부산 시민들의 저력이 느껴지는 문화시설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번 영화제에서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김동호 집행위원장의 명료한 퇴진이다. ‘부산국제영화제=김동호 영화제’라는 등식을 영화계 사람들과 부산 시민들은 공통으로 인정한다. 그가 아니면 우리나라에 국제영화제를 유치할 추진력을 얻기도 어려웠고, 성공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지난 2005년 10회를 끝으로 물러나려 했지만 그가 은퇴하면 추진하고 있는 여러 사업을 마무리 지을 수 없다고 영화제 관계자들이 전원 반대한 탓에 집행위원장직을 계속 수행하다가 지난 3년간은 이용관씨와 공동집행위원장 체제를 꾸려 노하우를 전수해주며 은퇴 준비를 해왔다.

이런 사정을 감안한다면 영화의전당이 완공된 올해 개막식에서는 한번쯤 무대에 올라 인사말 정도는 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개·폐막식 무대 어디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개막식 당시 프랑스 여배우 이자벨 위페르와 입장하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힌 것이 전부였다. 은퇴한 사람이 겉으로 드러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 이용관 신임 집행위원장은 “김동호 전 위원장은 온유하면서도 아닌 것은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무대에는 결코 불러낼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인물을 그리 중히 여기지 않는 우리 사회에서 15년간 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맡았다는 사실도 대단하지만, 이처럼 명쾌한 신(新)·구(舊) 리더십 교체의 의미 또한 크다 할 것이다. 각계에서 신·구간 리더십 갈등이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해보면 이 의견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60을 바라보는 나이에 영화제에 뛰어들어 개인의 힘으로 세계영화계에서 5위권의 영향력을 확보한 힘의 원천은 무엇인가.

얼마 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초상화의 비밀’ 전시회(9월27일∼11월6일)를 관람했다. 조선 태조 이성계를 비롯해 영조 철종 고종 등 4명의 어진(御眞)과 충신 공신 청백리 등 200여명의 초상을 보노라니까 남산 자락의 소나무 한그루 한그루가 죄다 훤히 들여다보이듯 마음이 맑아졌다. 조선 사대부들이 보여주는 담담한 초상은 자기 절제와 덕성(德性)이 극한으로 함축된 핍진(逼眞)의 세계였다.

그럴 것이다. 초상화는 아무나 남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름 난 사대부들이 마음을 가다듬어 인(仁) 의(義) 예(禮) 지(智)를 표정 속에 현현(顯現)하는 순간을 보여주는 것이기에 존재감은 높고 눈길은 깊다. 터럭 한 올까지도 세밀하게 그려낸 조선 초상화가 궁극적으로 보여주는 미덕은 ‘겸양’ 바로 그것이었다. 외국 초상화가 ‘개성’을 보여줄 때 우리는 개성을 내부에 묻고 ‘겸양’의 자세를 보여준다.

바로 그런 미덕이 아닌가 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15년간을 한 분야의 돋보이는 리더로 일하다가 깨끗하게 물러서기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수석 논설위원 so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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