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어부의 절규 … “나는 간첩이 아니다” 기사의 사진

2007년 2월 25일 충북 청주병원 영안실에 한 남자의 영정이 놓였다. 흰 국화꽃에 둘러싸인 고인은 환하게 웃지 않았다. 1950년 1월 10일 생인 고인의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23년간 아버지를 만나지 않은 아들(당시 28세)은 뒤늦게 무릎을 꿇고 앉아 목 놓아 오열했다. 아들은 아버지 생전 호적을 정리하려 했었다. 한 달 전, 아버지가 찾아왔을 때도 만나지 않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진실이 밝혀질 테니 하나하나 풀어나가자. 아들아, 아버지는 간첩이 아니야.” 아버지가 생전 마지막으로 남긴 휴대전화 음성 메시지였다.

남자는 충북 청원군 한 농가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발견 당시 남자는 한 손에 휴대전화를 잡은 채 쓰러져 있었다. 유품은 가난했다. 그림과 서예 몇 점, 그리고 옷가지가 전부였다. 어부, 기관사 보조, 페인트 가게 주인, 조선소 노동자, 서예가. 이것이 남자의 생전 직업이었다.

이 남자를 평생 따라 다닌 건 보안과 형사였다. 간첩 혐의로 14년간 감옥에 갇힌 남자는 98년 출소했다. 한 많은 남자는 이 산, 저 산 다니며 그림과 서예를 했다. 그리고 9년 뒤 숨을 거뒀다. 남자는 이상철씨다.

송환

스물한 살의 이상철은 어부였다. 부모님을 일찍 여읜 이상철은 동생 네 명을 먹여 살리는 가장이었다. 그의 인생은 한 번의 납치와 두 번의 투옥으로 설명되는데, 이상철이 처음 사라진 건 71년 9월 23일이었다. 그날 이상철이 승선한 ‘대복호’는 주문진항에서 출발해 바다에서 오징어 조업을 하다 태풍을 만났다.

집채만큼 큰 파도가 작은 배를 위협했고, 어부들은 배 밑으로 몸을 피했다. 한나절쯤 지났을까. 풍랑이 잠잠해지자 20명의 선원이 배 밖으로 나왔다. 이북 출신인 ‘먹구’ 영감이 주위를 둘러보다 중얼거렸다. “여긴 내 고향 같구먼. 저기 있는 산은 어릴 때 내가 살던 곳의 산과 비슷해.”

이 말에 어부들은 우왕좌왕했다. 배를 돌려 남한으로 갈지, 어찌 해야 할지 갈팡질팡하던 중에 북한 경비정 두 척이 나타났다. 기관실로 총알이 빗발쳤고, 어부들은 포위됐다. 그때부터 이상철은 북한에서 1년간 납치됐다. 그가 북한에서 무엇을 했는지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이상철은 이듬해 9월 7일 송환됐다. 남북한이 분단 이후 최초로 통일과 관련해 합의한 7.4 남북공동성명의 성과였다. 국가는 어부들의 송환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지난 8월 30일 평양에서 歷史的(역사적) 南北赤(남북적) 제1차 본회담이 열린 데 이어 오는 13일 서울에서 제2차 본회담이 막을 올린다. 이번 서울 회담은 南北赤本會談外的(남북적본회담외적)인 성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우선 북한은 北赤(북적) 대표단 일행 54명이 서울을 방문하기 5일 전인 7일 납북된 어선 8척과 어부 168명을 송환했다. 이들은 작년 동해와 서해 어로 저지선 근해에서 어로 작업을 하다 북한 경비정에 의해 납북된 어부들로 과거와 달리 북한에 잔류한 어부는 1명도 없었으며 집단으로 대거 송환한 것도 드문 일이다.’ (경향신문 5면·72년 9월 11일)

신문은 이상철 등의 송환을 이렇게 기록했다.

조작된 기록

송환은 그러나 어부들에게 비극의 시작이었다. 이들이 남한 땅을 밟자마자 끌려간 곳은 속초시청의 체육관이었고, 수사관들은 어부 1명씩 여인숙으로 따로 불러냈다.

“정말 풍랑에 의해서 떠밀려간 것이지 일부러 월선해서 고기를 잡은 적이 없습니다.”

수사관들은 이렇게 말하는 어부들을 마구 때렸다. 결국 이상철 등은 자발적으로 군사 분계선을 넘은 어부들로 사건은 조작됐다. 강릉경찰서 정보과가 작성한 이상철의 신문조서는 다음과 같다.

‘이상철이 승선한 대복호가 1971. 9. 23. 10:00경 전시 해점을 출발하여 시속 5마일로서 2시간 항해한 해점 북위 39도 03분 30초, 동경 131도 24분에 도착함으로써 행정관청이 제한한 동해어로저지선과 국방 군사상 필요에 의하여 설정한 동해 군사분계선을 월선하여 오징어 조업을 한 것이다.’

이상철은 송환 직후부터 41일간 영장 없이 구금됐고, 구속영장은 72년 10월 17일 발부됐다. 이상철은 반공법 위반 혐의 등으로 기소돼 같은 해 12월 4일 춘천지방법원 강릉지원에서 징역 1년에 자격정지 1년을 선고받았다. 선장 조모씨 등 10명도 각각 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조서를 조작한 강릉경찰서 김모 형사는 훗날에서야 이렇게 고백했다.

“사실 나는 해점이 뭔지 모르고 해도를 볼 줄도 모릅니다. 선장이나 배의 위치를 알까, 기관장이나 선원들은 배의 위치를 모릅니다. 당시 강릉경찰서 정보과 박모 경위가 월선한 해점에 대해 북위 몇 도, 동경 몇 도라는 쪽지를 주면 납북 어부들에게 ‘북위 몇 도, 동경 몇 도에서 월선 조업을 한 것이 맞죠?’라고 물어보았고, 납북 어부들은 북한에 갔다 온 것 때문에 처벌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저 ‘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럼 우리들은 월선 혐의에 맞추어서 조서를 받았습니다. 이상철의 조서도 위에서 지시한 대로 작성했습니다.”

진실은 조작됐고, 어부 이상철은 진실을 밝혀낼 힘이 없었다.

짧은 행복

교도소를 나온 이상철은 가족을 찾았지만 이미 뿔뿔이 흩어진 뒤였다. 여동생은 열여섯 나이에 시집을 갔고, 남동생 한 명은 주문진 항구의 가게 점원으로, 막내 남동생은 남의 집 양자로 들어갔다.

이상철은 그러나 다시 새 삶을 시작했다. 77년 거제도에 정착한 그는 결혼해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두었고, 페인트 가게 ‘강원 도료’를 열었다. 토목 수로 공사에 하청업자로 일해 돈도 조금 벌었다. 2년 뒤에는 남동생 두 명을 거제도로 불러 함께 살 수 있었다. 그의 인생에 아주 잠깐 행복이 깃들었다.

그러나 인생은 그렇게 쉽지 않고, 계획대로 되지도 않는다. 이상철의 인생은 더욱 그랬다. 사업이 어려워지자 이상철은 82년 일을 접고, 이런 저런 일을 하며 취업을 준비했다. 그는 매일 일기를 쓰며 오늘을 반성하고 내일을 준비했다. 다시 희망이 올 줄 알았다.

“너무 적은 봉급으로 가정 유지가 불가능하다. 이번에 쓴 돈이 많아 적자 육만원이 훨씬 넘었다. 탁상시계 육천오백원, 시계줄 천오백원에 처(妻) 고대기 만구천원, 처와 아이 약값 이천오백원 등이 육만오천백원이다.” (83年 1月 6日 목요일 날씨 맑음)

“내가 아래 담배 가게에서 사온 찹쌀모치를 딸 ○○와 아들 ○○에게 내놓았더니 애들은 별로 먹지를 않고 처가 좋아하는 것 같았다. 나는 몹시 먹고 싶었으나 참고 처가 먹는 것을 지켜보았다.” (83年 2月 6日 일요일 날씨 맑음)

“아무리 괴롭고 힘겹다 해도 착실하게 노력해 기울어진 가정을 한시 바삐 일으켜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괴로워하는 처를 위로하며 내 자신의 잘못된 처사와 모처럼 처의 생일인데도 선물 하나 제대로 해주지 못하는 내 자신의 무능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일기를 적는다.” (83年 3月 5日 토요일 날씨 맑음)

이상철은 다행히 83년 봄, 대우조선소에 시설관리부반장으로 취업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또 한번 국가에 의해 유린당했다.

고문

83년 11월 15일. 국가는 이상철을 다시 잡아가둔다. 같이 납북됐던 동료가 간첩 행위를 하다가 3개월 전 체포됐으니 이상철 또한 간첩이라는 이유였다.

이상철은 경남 거제군 대우조선소에서 일하다 수사관 4명에게 끌려갔고, 37일간 영장 없이 구금됐다. 창원 제502 보안대 지하실에서 그는 고문을 받았다.

수사관은 발가벗긴 이상철을 의자에 앉혀 손과 발을 묶고 성기에다 전기선을 감아 전기 고문을 했다. 이상철이 기절하면 물을 부었다. 이상철을 거꾸로 매달아 물탱크에 집어넣고 한참 뒤 꺼내 발로 밟아 물을 토하게 했다. 잠은 하루에 2시간 재웠다. 이상철이 잘 때 담요를 어깨 이상으로 올리면 수사관이 밑으로 내렸다. 발뒤꿈치가 들리게끔 이상철을 세운 뒤 천장에다 머리를 팽팽하게 매달아 놓아 잠시라도 졸면 머리카락이 빠졌다. 수사관이 이상철을 사흘 굶긴 뒤 그 앞에서 불고기와 소주를 먹었다. “지장을 찍으면 고기를 주겠다.” 수사관이 웃으며 유혹했다.

오른쪽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이상철에게 수사관은 “옆방에 네 동생과 처가 고문을 받으니 잘 들어봐라”고도 했다. 이상철은 고문 37일 만에 자신이 간첩이라고 거짓 자백했다.

그가 잡혀가자 경찰과 보안대는 이상철을 놓고 갈등을 빚었다. 당시 경찰은 납북된 경험이 있는 이상철을 통해 다른 간첩을 잡으려고 했다. 경찰은 북한에서 이상철이 배운 지령과 접선 방법을 신문사에 광고로도 게재했다.

경남지방경찰청 대공과 손모 형사는 보안대로 찾아가 보안대장(중령)에게 항의했다. “우리들이 이상철을 통해 간첩을 잡으려고 접선 공작을 하고 있는데 이렇게 뺏아가면 어떡합니까?” 그러나 보안대는 꿈적도 않았다. 경찰이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에 수사 조정 의뢰를 했지만 안기부는 의뢰를 거절했다.

이상철의 동생들은 “형이 조만간 건강하게 나올 거다”는 거제경찰서 형사들의 말만 철썩 같이 믿었다. 당시 형사들은 이상철에게 거처를 제공하거나 직장을 소개할 만큼 친밀한 사이였다. 동생들은 순진했다.

교도소

이상철은 83년 11월 15일 국가보안법위반 7년, 반공법위반 7년, 향군법위반 3년으로 17년 형을 선고 받는다. 항소와 상고를 거쳤지만 결과는 같았다. 법은 이상철을 보호하지 않았다.

간첩 색출에 이용되던 이상철은 한순간에 간첩이 돼 전주교도소에 수감됐다. 매일 술로 비탄의 나날을 보내던 동생 상근(당시 29세)이 3년 뒤 간암으로 세상을 떴다. 충격을 받은 이상철은 교도소에서 난리를 피웠지만 동생의 장례식에 갈 수 없었다.

이상철은 광주교도소로 이감됐다. 아주 조금씩 그곳에서의 생활에 적응해나갔다. 교도소 서예반에서 글씨와 그림으로 마음을 겨우 잡은 그는 현대미술대전에 수차례 특선했다. 그는 그림을 그리거나 막내동생에게 편지를 보내며 늙어갔다.

“이 못난 형이 해마다 작품 출품으로 늘 동생 가정에 무거운 부담을 안겨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구려. 이 못난 형이 이렇게라도 위안의 작은 결실이라도 거머쥐지 않고는 이곳에서의 십수년 시간을 감당하기 어렵구려.” (95년 5월 28일)

“어려서 일을 잘 못한다고 어른들에게 두들겨 맞으며 눈물을 머금던 나는 서른 살만 되기를 바라고 이를 앙 다물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마흔 고개 지나 오십 줄에 접어들게 되었으니 인생무상이구나.” (95년 11월 18일)

“이 못난 형은 저 들판의 잡초처럼 짓밟히고 쓰러져도 일어나서 이 몸, 땅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맺히고 맺힌 한을 풀어야 눈을 감을 수 있지 않겠는가.” (97년 3월 2일)

이상철은 14년을 복역하고 98년 8월 15일 세상으로 나왔다. 햇빛은 찬란했다.

무죄

이상철은 출소 후에도 아들, 딸을 만나지 않았다. 간첩의 자식이란 비난을 받았던 자녀에게 다시 아픔을 주는 아비가 되고 싶지 않았다. 이상철은 승려가 됐다. 출소한 그는 딸에게 전화해 승려가 되겠다고 했고, 딸은 반대하지 않았다. 이상철은 딸의 결혼식에 가서도 몰래 먼발치서 신부의 얼굴을 보고선 돌아섰다.

이상철은 아버지였지만, 아버지가 아닌 사람으로, 대한민국 국민이지만, 국민이 아닌 자로 살아야 했다. 가난하고, 배우지 못하고, 도움 받지 못하고, 누명으로 교도소에서 인생의 한나절을 보냈지만 소외된 이웃을 돌보려 했다. 스승 오제 박남준(71) 서예가와 전북 전주시 모처에서 불우이웃돕기 전시회를 열기도 했고, 인생 말년에는 충북 청원의 한 농가에서 고아원과 양로원을 지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사망 직전까지 무죄를 입증하지 못했다. 그가 숨지기 약 한 달 전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과거사위)로부터 본격적인 조사에 들어갈 예정이라는 연락을 받고 한 줄기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심장마비로 2007년 2월 25일 숨을 멈췄다.

지난해 1월 과거사위가 이상철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자녀들이 청구한 재심에서 창원지법 제4형사부(부장판사 김경환)는 14년을 복역한 이상철에게 지난 20일 무죄를 선고했다. 27년 전 수사기관의 폭행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상철의 간첩 혐의에 대해 위증했던 10여명의 사람들이 법정에서 진실을 토했다.

“과거 법원의 잘못된 판단에 대해 그동안 커다란 고통을 받은 피고인과 그 유족들에게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부디 이 판결이 피고인과 유족들에게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재심 청구인, 고생하셨습니다.”

김 판사는 선고를 마치고 이렇게 말했다. 가족들은 끅끅, 울음을 참다 눈물을 터뜨렸다.

과거사위가 확인한 국내 납북 어부 간첩은 97건(103명)으로 이 중 30건이 재심 신청됐다. 30건 중 13건이 무죄 판결을 받았고 나머지는 재심이 진행 중이다.

지난 21일 신문의 한 귀퉁이에는 ‘납북 어부 이상철씨 27년 만에 무죄’ 기사가 실렸다. 한 인간이 국가에 의해 사실상 사형 당했던 고통의 나날들에 비하면 초라할 만큼 작은 기사였다.

“군사 정권은 정치적인 이유로 언론에 지속적으로 간첩을 검거했다고 발표했다. 남파 간첩들이 정권이 원하는 대로 잘 검거되지 않자 간첩을 양산하기에 이르렀다.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한 납북 귀환 어부들은 간첩 만들기 쉬운 대상들이었다. 그들은 가난해서 변호사를 선임할 비용이 없었고, 자기 방어 능력도 없었다. 광주를 피로 물들인 전두환 정권은 국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80년대 초반 다시 납북 귀환 어부들을 간첩으로 만들었다.” (정광호 과거사위 전 조사관)

박유리 기자 nopimul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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