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 옛 그림] (94) 울며 응원하는 기러기 기사의 사진

만물이 시드는 가을, 잎은 가지를 떠나고 해는 땅에서 멀어지고 벌레는 숲으로 숨는다. 식솔을 거느린 기러기 떼는 어떤가. 가을 깊어질 즈음 나타나 강물이 먼 늪지로 날아든다. 길고 긴 대열을 지어 우짖으며 나는 기러기는 오고 가야할 때를 아는 철새다.

안중식이 그린 ‘노안도(蘆雁圖)’에 서정성이 푸근하다. 기러기 가족이 갈대 하늘거리는 수초 밭에 안착한다.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내려와 푸르른 달무리를 이룬다. 부리를 벌리고 소리치는 기러기들은 눈을 또랑또랑하게 떴는데, 단잠에 빠진 녀석은 눈꺼풀이 까무룩 내려앉았다. 날개에 묻은 먹색은 짙고 연한 변화를 드러내고 갈대꽃에 젖은 하얀 색은 달무리에 번졌다. 잠든 녀석의 꿈은 어느 곳을 헤매고 있을까.

화가는 그림 속에 사연을 적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는 푸른 잎 늘어지고/ 높고 낮은 구름이 저녁놀에 물드네/ 달빛 가장 밝으니 가을밤 길기만 한데/ 기러기 울음소리가 강남에 먼저 이르네.’ 기러기 무리는 먼 길을 갈 때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로 짖으며 응답한다. 울음소리는 지친 짝에게 용기를 불어넣는 응원가다. 그 소리에 담긴 추임새가 있어 따뜻한 강남이 멀지 않다.

기러기와 갈대를 그린 그림은 ‘늙어서 편안하게 지내라’는 덕담을 전한다. 갈대 ‘노(蘆)’는 늙을 ‘노(老)’ 자와, 기러기 ‘안(雁)’은 편안할 ‘안(安)’ 자와 발음이 통한다. 기러기의 행렬은 형제들이 나란히 길을 가는 모습처럼 다정하다. 안중식의 ‘노안도’는 가족의 다사로움이 깃든 그림이다.

손철주(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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