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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시각-한민수] 세번의 오판

[데스크시각-한민수] 세번의 오판 기사의 사진

정치 담당 기자를 하면서 2000년 이후 세 번의 오판(誤判)을 했다. 물론 작은 판단 착오를 제외하고 뇌리에 선명하게 남은 것만 꼽은 것이다.

#2004년 3월 초=국회의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초읽기에 들어간 긴박한 상황이었다. 한나라당을 중심으로 한 반노(反盧) 진영이 탄핵소추안을 과연 처리할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한나라당을 출입하던 기자는 당시 원내를 책임지고 있던 고위 인사 A씨를 따로 만났다. “정말 탄핵하는 겁니까?” A씨는 “기사를 쓰지 않는 조건으로 말해줄게. 내가 역사에 무슨 책임을 지려고…”라고 은밀하게 속삭였다.

하지만 며칠 뒤 노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은 통과됐다(후일 그도 탄핵까지 갈지는 정말 몰랐다고 했다). 그 직후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는 동료 의원들에게 “이 정권은 끝났다”고 말했고,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열린우리당 문희상 의원도 “아, 권력을 넘겨주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기자도 소추안이 통과되기 전날까지도 ‘설마’ 했고 탄핵이 되자 노 대통령이 임기를 채우지 못할 수도 있다고 봤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2008년 4월 중순=이명박 대통령이 미국 캠프 데이비드에서 조지 W 부시 대통령을 만났다. 한국 언론은 최초의 미 대통령 별장 방문이라는 의미를 붙이며 ‘한·미 동맹’을 잔뜩 부각시켰다. 기분이 좋아진 이 대통령은 국내에서 진행된 한·미 쇠고기 협상 타결 직전 이 내용을 미 기업인 등에게 미리 알려주기까지 했다. 귀국길에 일본을 방문한 이 대통령은 “이제 우리도 질 좋은 쇠고기를 싸게 먹을 수 있게 됐다”고 말했고 순방에 동행한 기자들은 진짜 그런 줄 알았다. 모두에게 좋은 일이라는 생각에 촛불시위의 낌새도 알아채지 못했다. ‘명박산성’ 뒤에 있던 이 대통령과 그 주변인들만 딴 세상에 살았던 셈이다.

#2009년 6월 중순=이번엔 ‘안철수’를 몰랐다. MBC TV ‘무릎팍도사’에 나온 안철수 교수를 본 아내가 물었다. “안 교수가 대선에 출마하면 어떻게 될 것 같아?” 그 시점부터 ‘잠룡(潛龍) 안철수’는 자라고 있었지만 명색이 정치부 기자는 퉁명스럽게 훈계한다. “무슨 안철수가 대통령 선거에 나와! 잠시 인기 있다고 다 대통령 되는 게 아니야.” 정계의 고수 한나라당 홍준표 대표마저도 지난 9월 “철수가 나오면 영희도 나오고, 국어책에도 나와 있지 않느냐”고 비꼬았지만 안 교수는 현재 여야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유력 차기 대선주자다.

이렇게 크게 3번 틀리고 나니 이제는 ‘민심을 읽는다’는 게 겁이 날 때가 종종 있다. 이러다가 나만 딴 길을 가는 것 아닌가 하는 초조감도 작지 않다. 그나마 위안을 삼는 것은 비슷한 부류가 여의도에는 아직도 많이 있다는 정도다. 지난달 초 만난 친박근혜계 인사는 오세훈 전 시장이 그나마 잘한 게 있다고 했다. 그는 “안철수가 내년 이맘때 나왔다고 가정해 봐라. 눈 뜨고 당할 뻔했다”고 안도했다. 오 전 시장 덕분에 그나마 대비할 시간이 생겼다는 얘기다.

아무튼 동물적 감각을 지닌 정치인들은 2040세대 대책을 세우겠다고 벌써부터 난리다. 하지만 여전히 미덥지 않다. 당장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다루는 것만 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게 맞다. 직업적 본능으로 볼 때 이대로 가면 내년 4월 총선에서는 더 큰 사단이 날 것 같다. 기성 정당과 시민사회를 필두로 하는 제3세력이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여 한쪽은 상당한 내상을 입을 수 있다. 아무래도 현재로선 기존 정치질서가 깨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곰곰이 돌이켜보면 작금의 흐름은 적어도 8년 전부터 숙성돼 왔는지 모른다. 또다시 민심으로부터 동떨어진 ‘갈라파고스섬’에 남지 않기 위해 오늘도 촉수(觸手)를 가다듬어 본다.

한민수 정치부장 msh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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