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 옛 그림] (95) 서리 밟고 가는 먼 길 기사의 사진

날은 음력 초사나흘 무렵, 해 지자 초승달 나뭇가지에 내려앉는 산골이다. 어지러이 늘어선 나목 사이로 민가는 멀어 아득하고 굽은 산길은 가까워 또렷하다. 우마(牛馬) 두 필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갈 길을 재촉하는데, 길마 위에 얹은 짐이 새끼에 매여 꾸림이 야물딱지다. 산등성이에 이내 끼고 길바닥에 서리 밟히는, 철은 늦가을이다.

뒤따르는 사내가 셋이다. 보따리 등짐에 잔뜩 기운 몸을 작대기에 의지한 이는 패랭이 눌러쓰고 남바위를 둘렀다. 구부정한 자세로 곰방대를 물거나 소매에 두 손을 집어넣은 사내 둘은 키 큰 나무에 가려 보일락말락 한다. 누구이기에 해 떨어진 저 산골을 하염없이 걸을까. 차림은 본새 뻔한 행상인데, 터벅터벅 그리고 꾸역꾸역 장날을 찾아 원행할 수밖에 없는 저들의 발걸음이 어스레한 풍경과 맞물려 가슴이 다 시리다.

그린 이는 젊은 김홍도다. 낮은 신분의 장사치를 묘사한 그의 붓질은 따습고 초목 우거진 산비탈의 날씨는 사느랗다. 힘들고 먼 장삿길에도 불평 한마디 내뱉지 않는 서민의 너그러운 삶이 화가의 정성어린 붓끝에 와 닿았다. 그림도 자신감 넘치는 솜씨다. 화가의 스승인 강세황이 거드는 글을 윗머리에 적어주며 칭찬한다.

‘이지러진 달이 나무에 걸리자 닭들이 다투어 짖는다. 소와 말을 몰아 서리 밟고 바람 부딪치니 그림 속 사람들은 즐겁지 않아도 보는 이는 도리어 정취에 겹다. 붓끝이 오묘해서 감정이 족히 살아났구나.’ 바람 속에 밥을 먹고 이슬 맞으며 잠을 자는 장삿길이 흥겨울 리야 있겠는가. 그 고단한 날들을 다독여주는 화가가 있어 옛 그림의 속정이 이토록 깊어진다.

손철주(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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