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순만 칼럼] 성경과 논어 기사의 사진

“노골적인 독선의 시대다. 자기편이 아니면 절대적인 비방의 대상이 된다”

한 변호사가 서울 봉천동 달동네의 한 사람을 찾아갔다. 네댓 평짜리 임대주택에 홀로 누워 있는 60대 초반의 환자였다. 하루 18시간 이상을 누워 지낸다고 했다. 말도 거의 하지 못했다. 말기 폐암 환자였다. 말을 못하는 이유는 폐암 수술 중 의료사고로 추정되는 이상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환자는 모든 것을 단념한 상태였다. 가정은 풍비박산 났고, 한때 호기롭게 살았던 세상의 기억도 버렸다. 의료소송에서 이겨 얼마간이라도 보상금을 받으면 불행하게 살고 있는 딸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것이 유일한 소망이었다.

누추한 곳에 누워 있는 환자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임대주택을 준 정부, 매일 정해진 시간에 들러 냉장고에 음식을 넣어주고 가는 자원봉사자들, 벌집같이 들어선 임대주택의 옆방에 누워 있는 같은 처지의 환자들. 그들 모두가 고맙고, 세상이 고맙다고 했다. 놀라운 것은 옆방의 환자들 역시 세상에 대한 고마움을 안고 생활하고 있었다. 죽어가면서 사람들은 선해지는 것일까.

환자는 한때 이름 있던 시인이었다. 시와 희곡으로 데뷔했고 주요 문학상도 수상한 문인이었다. 변호사는 누워 있는 시인을 일으켜 목욕을 시켜주었다. 6개월 만의 목욕이라며 감격해했다. 변호사는 그런 사람들의 마지막 소송을 포함해 잔일을 도와주는 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십일조로 생각한다고 했다(여러 해 동안 돈과 책을 기부했고 자원봉사자들을 도와온 이 변호사가 최근 어떤 글에서 ‘우리 사회에는 자기편이 아니면 헌신하는 사람들조차 비뚤어진 눈으로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 자신들은 정작 손가락 하나 남을 도와주지 않은 사람들일 가능성이 크다’고 쓴 것을 읽은 적이 있다).

시인은 젊어서 누구 못지않게 갖고 있던 장서들도 처분해 버렸다고 했다. 그러나 단 두 권의 책은 버릴 수 없었다며 그가 지니고 있는 것을 보여주었다. ‘성경(the Bible)’과 ‘논어(論語)’였다. 죽는 순간까지 머리맡에 놓고 싶다고 하는 책. 사랑과 인(仁)에 관한 지상 최고의 책이었다.

평생 말(言)과 인식에 관심을 가졌던 시인이 죽음을 바라보며 성경과 논어 단 두 권의 책만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생각하게 하는 것이 많다. 지난번 서울시장 선거 때도 보았지만 우리는 이제 노골적이라고 할 만큼 독선(獨善)의 시대에 살고 있다. A후보를 지지하는 사람은 A에게 어떤 결함이 있어도 전부 두둔하고 B후보의 모든 것은 비방한다. B후보를 지지하는 사람은 A후보에게 또 그런 식이다. 동네복덕방이 그렇고, 내로라하는 언론이 그렇다. 강호의 담론이 그렇고, 장안의 논객이 그렇다. 불편부당(不偏不黨)이나 예우 같은 덕목이란 다 걷어치운 듯하다.

머릿속에서 꾸미는 논리는 무한정 가능해 보이고, 어떤 것이라도 꿰맞추지 못할 변설(辯舌)은 없다. 세상 누구에게라도 어떤 소재로든 공격하는 것은 여반장이다. 인류 고전 속으로 깊이 자맥질해 보지 않는다면 현대사회에서의 교언(巧言)과 영색(令色)은 더욱 방창해질 것이다.

논어의 마지막 권인 요왈(堯曰)편 끝 장에서 공자는 명(命)과 예(禮)와 말(言) 세 가지를 알아야 군자의 일이 갖추어진다고 가르쳤다. 여기서 명은 이해관계에 따라 오락가락하지 않아야 할 (하늘의) 명이 있음을 알고 믿는 것, 예는 눈과 귀와 수족(手足)을 제대로 다스릴 수 있는 정도의 예의, 말은 간사함과 올바름을 가려 알 수 있는 식견을 말한다고 한다.

그 시인을 잘 알던 K시인에게 죽어가는 시인의 근황을 알려주었다. 수온 상승과 인간들의 남획 때문에 돌아오지 않는 명태의 이야기를 쓰기 위해 강원도 거진 일대로 취재를 다니고 있다는 K시인은 “그렇게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감사함을 잃지 않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이냐”며 놀라워했다. 시인이 끝까지 지닐 두 권의 책을 생각하면서, 공자께서 논어 마지막 장에서 일러준 정도의 기본은 갖추고 있는지를 돌아보고 부끄러워한다.

임순만 수석 논설위원 so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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