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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시]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최승자 (1952∼ )

겨울동안 너는 다정했었다

눈의 흰 손이 우리의 잠을 어루만지고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따뜻한 땅속을 떠돌 동안엔//

봄이 오고 너는 갔다

라일락 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

먼 곳에서도 너는 웃지 않았다

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

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나를 찔렀고

그래, 나는 소리없이 오래 찔렸다//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오래 기어서라도

가고 싶다 네가 있는 곳으로.

너의 따뜻한 불빛 안으로 숨어들어가

다시 한번 최후로 찔리면서

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

그리고 지금, 주인없는 해진 신발마냥

내가 빈 벌판을 헤맬 때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눈 덮인 꿈속을 떠돌던 몇 세기 전의 겨울을


지금 병실에 있는 최승자 시인을 얘기할 때 이 시를 빼놓기 어렵다. 시절은 살벌했어도 낭만은 살아있던 때였다. 그때 청파동에는 빈대떡집과 여자대학과 낡은 골목들이 스산하게 널려 있었다. 이 시의 핵심은 계절이 바뀌자 수백 년 전의 일처럼 멀리 가버린 사랑이 당도하고 싶은 청파(靑坡)의 꿈에 있지 않다. 가버린 사랑을 향해 지렁이처럼 찔린 몸으로 기어가는 치욕과, 한없이 오래 죽어가는 처절함에 있다. 오늘 다시 난로를 피우며 이 시를 읽는다. 묻는다. 승자야, 지금도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다시 기어갈 수 있는가.

임순만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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