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말걸기-장지영] 登山과 入山 기사의 사진

근대적 의미의 등산을 뜻하는 알피니즘(Alpinism)의 시작은 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760년 스위스의 학자 오라스 베네딕트 드 소쉬르(1740∼1799)는 알프스의 최고봉 몽블랑(4807m) 최초 등정에 상금을 걸었다. 당시엔 몽블랑에 악마가 산다는 미신이 횡행해 정상에 도전하는 이가 없었다. 마침내 16년이 지난 뒤 프랑스의 의사 가브리엘 파카르와 수정 채취업자 자크 발마가 몽블랑 정상에 올랐다. 두 사람의 소식을 들은 소쉬르가 이듬해 발마를 길잡이로 정상에 오르는 등 알프스는 점차 인간이 오를 수 있는 산으로 인식됐다.

이후 19세기 등산가들은 알프스의 4000m급 미답봉을 경쟁하듯 올랐다. 바로 산의 최고점을 누구보다 먼저 오르는 ‘등정주의(登頂主義)’의 시작이다. 이에 반대해 영국 등반가 앨버트 프레데릭 머메리(1855∼1895)는 좀더 어렵고 다양한 길을 개척하는 ‘등로주의(登路主義)’를 주장해 큰 영향을 끼쳤다.

알프스의 봉우리와 험준한 북벽 등정이 모두 이뤄지자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히말라야로 옮겨졌다. 특히 1950∼60년대는 국가의 지원을 받는 대규모 원정대가 히말라야 8000m급 14봉 최초 등정을 놓고 경쟁을 벌였다. 하지만 히말라야 최초 등정 시대가 끝난 이후 등반가들은 무산소 등정, 단독 등정 등 등로주의를 구현해 나갔다.

국내에 서구식 알피니즘이 도입된 것은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다.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산을 오르는 것은 탐승(探勝)의 차원이었으나 이때부터 등반의 개념이 본격화됐다. 1960년대부터 해외로 눈을 돌린 한국 산악계에 1977년 9월 대한산악연맹팀의 고상돈 대원이 최고봉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당시 원정대가 귀국한 뒤 카퍼레이드를 벌이고 고상돈 대원이 국민 영웅으로 떠오른 것은 한국에서 등정주의가 본격화됐음을 보여주는 신호탄이었다.

고상돈 이후 한국 산악인들은 히말라야에 앞다퉈 달려갔고, 속속 8000m급 고봉 등정에 성공했다. 특히 엄홍길은 2000년 한국인으로는 처음 히말라야 14좌 완등에 성공하며 ‘영웅’으로 떠올랐다. 박영석은 14좌 완등에 이어 남·북극점 도보 도달까지 이뤄냈다. 한왕용과 김재수, 칸첸중가 등정 여부로 논란을 빚은 여성 산악인 오은선이 14좌 완등에 성공했고, 김창호와 서성호는 14좌 무산소 완등을 앞두고 있어 가히 ‘산악영웅 전성시대’라 할 만하다.

하지만 한국 알피니즘의 이런 빛 뒤에는 그늘도 적지 않았다. 국내 최초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한 남녀 산악인 고상돈과 지현옥을 비롯해 여성 최초 14좌 완등에 도전했던 고미영, 지난 10월 안나푸르나 남벽에 신루트를 개척하려던 박영석, 지난 11일 히말라야 촐라체 북벽을 오르던 김형일과 장지명 등이 잇따라 불귀의 객이 됐다.

최근 잇단 산악인의 사고에 대해 일각에서는 아웃도어 업체들이 산악인들의 도전을 부추기고 산악인들은 후원을 받기 위해 무리수를 둔다는 평가도 나온다. 실제로 국내 아웃도어 업체들은 경쟁적으로 유명 산악인들을 영입했고, 이들 업체의 매출은 급신장했다. 이에 대해 산악인들은 “알피니즘 추구는 도전에 대한 열정일 뿐”이라며 반박한다.

물론 극한 환경 속에서 인간 한계에 도전하는 한국 산악인들의 도전정신은 존경할 만하다. 하지만 이런 도전이 ‘세계 최초’ ‘여성 최초’ 등의 타이틀에 지나치게 집착한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 나아가 알피니즘이 한국의 성장주의, 국가주의와 맞물려 산을 정복하는 데만 관심을 둔 것은 아니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옛 선인들이 산을 오르는 등산(登山)보다 산에 들어가 산과 하나가 되는 입산(入山)을 높이 평가했던 것을 되돌아봤으면 한다.

장지영 체육부 차장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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