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문 한 장으로 금연공원 담뱃불 껐다… ‘금연공원내 흡연구역’ 백지화 이끈 박재갑 교수 기사의 사진

1964년 1월 11일 미국 공중위생국은 ‘흡연과 건강’이라는 방대한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흡연은 암을 유발한다”고 결론 내렸다. 미국인들을 경악시킨 이 보고서 이후, 현대 문명국에서 담배는 ‘죽음의 전령’으로 간주돼 왔다. 담배회사는 ‘죽음의 상인’으로도 불린다. 한국에서도 흡연이 암을 유발한다는 사실은 상식에 가깝다.

그러나 어인 일인지 지난해 기준 19세 이상 남성 흡연율은 무려 48.3%나 된다. ‘죽음의 연기’인 줄은 알지만, 알아도 그냥 피운다? 한국 사회가 고도의 스트레스 사회라는 점을 감안하면 한 모금 연기에 시름을 날려 보내려는 사람들 심정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담배의 해악이 워낙 치명적인 탓에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에만 맡기지 않고 공적 차원에서 금연을 강제하려는 여러 정책적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지난해 5월 개정된 ‘국민건강증진법’이다. 이 법에 따라 지방자치단체는 필요시 공공장소를 금연구역으로 지정할 수 있게 됐으며 서울시와 부산시, 울산시 등이 시민들의 간접흡연 피해를 줄이기 위해 주요 광장과 공원 등에서의 흡연을 금지토록 했다. 여론은 대체로 환영했다.

그런데 전국 지자체 중 가장 선도적 위치에 있는 서울시에서 갑자기 찬물을 끼얹는 듯한 방침을 지난달 18일 발표했다. 금연구역으로 지정된 시내 공원 20곳 중 여의도공원, 남산공원, 보라매공원 등 15곳에 11월 말까지 별도의 흡연시설을 설치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흡연시설이라는 게 밀폐된 공간이 아니라 사방으로 다 뚫린 캐빈형, 나무울타리형, 화분배치형 등이기 때문에 독한 담배 연기가 당연히 주변으로 흘러나갈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간접흡연 차단을 위한 금연 공원 지정의 본래 취지를 역행하는 것이었다. 주요 언론 대부분이 그 문제점을 지적하고 반대했다(본보 10월 19일자 1면 ‘금연공원에 흡연구역…담배 거꾸로 무는 서울시’ 참조).

그러나 서울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흡연인구를 배려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는 이유였다. 그런데 지난 7일 또 한 번 반전이 일어났다. 서울시가 흡연구역 설치 방침을 유보키로 했다고 전격적으로 발표를 한 것이다(‘유보’의 의미가 다소 애매해 기자가 17일 서울시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문의하자 담당자는 “흡연시설을 만들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라고 확답했다). 이유는 ‘한국 담배 제조 및 매매 금지 추진운동본부’ 대표인 박재갑(63) 서울대 의대 교수가 박원순 서울시장 앞으로 항의공문을 보냈고, 이를 본 박 시장이 공감을 표시하며 담당자들에게 재검토를 지시했다는 것이다.

시민단체에서 항의하면 서울시 공식 정책이 하루아침에 철회될 수 있는 건가? 언론의 집중포화에도 아랑곳하지 않던 서울시를 A4용지 단 1장짜리 공문으로 궤도 수정시킨 박 교수를 서울 연건동 서울대병원 사무실에서 만났다.

-금연공원 내 흡연구역 설치가 사실 박 시장 취임 전, 오세훈 시장 시절에 만들어진 정책 아닌가요?

“오 시장이 있을 때부터 논의가 됐는지는 모르지만, 그 사람이 사퇴(오 시장은 8월 26일 사퇴를 공식 발표했다)하고 시장이 공석인 상황에서 그런 발표가 나온 겁니다. 그래서 내가 어? 이거 봐라? 시장도 없는데 이런 게 발표가 되나? 하고 의아했던 거죠. 곧바로 항의 공문을 보내려다가 시장직무대행이 누군지도 모르겠고, 무슨 권한이 있을 것 같지도 않고 해서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공문 한 장 달랑 보냈는데 서울시에서 바로 반응을 보인 겁니까?

“공문을 1일 발송했는데, 그 전날 담당 과장한테 미리 서류를 보내고 전화했습니다. ‘내일 이런 공문 보낼 테니 당신이 먼저 검토해보라’고 말이죠. 그리고 당일에 우리 연구원 시켜서 시에 제출했습니다. 다시 내가 시장실에 전화해서 비서한테 이런 공문 접수했으니 시장한테 보고 드리라고 했죠. 그리고 담당 국장에게 또 전화를 했습니다. 공문 보내고 가만히 있으면 공무원들이 그냥 덮어버리거든요. 이 사람들이 움직이게 해야죠.”

-통화하면서 뭐라고 하셨나요?

“담당자들한테 내가 그랬습니다. ‘시장 잘 모셔라. 당신들이 잘못 모시면 내가 치명타를 날릴 거다. 여러 가지 꿈을 안고 시장에 취임했는데 내가 그 사람 상처내면 되겠느냐. 나는 대통령도 공개 비난하는 사람이다. 금연공원에 흡연시설 설치한다는 계획 그냥 밀고가면 나는 시장을 비난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작심하고 치명적인 공격을 할 거다.’ 담배 갖고 이상한 짓하면 내가 직격탄을 날릴 수 있는 사람이거든요.(웃음) ‘지도자 좋아하네’ 하고 말이죠. 서울은 대한민국의 얼굴인데 금연공연에 흡연시설? 이거 완전히 사기꾼들 아닙니까?”

‘나는 대통령도 공개 비난하는 사람’이라는 건, 지난해 2월 22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이명박 대통령에게 담배 제조 및 판매 금지를 공개 촉구했던 경우를 일컫는 것이다. 당시 박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담배로 인해 귀중한 생명을 잃는 사람이 매일 평균 137명씩, 한 해 5만명에 달합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책임이 있는 대통령께서는 이 같은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라고 목청을 높였다.

-박 시장과도 직접 통화했다고 들었습니다.

“취임 직후라 정신없이 바빴을 텐데 공문 접수하고 사흘 지나서 시장한테 전화가 왔더군요. 토요일이었던 5일 오후 1시쯤인데, 아마 공식 일정 끝내고 짬을 내서 전화한 것 같아요. ‘담당 국장한테 박 교수님 자문을 많이 받으라고 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얘기하다 박 시장이 ‘교수님이 몇 년 전에 입법 청원하실 때 저도 청원인으로 참여했었잖아요’ 그러는 겁니다. 제가 2006년 2월 22일에 ‘담배 제조 및 매매 등의 금지에 관한 법률’ 입법 청원을 17대 국회에 냈는데, 그때 청원인 158명 중에 박 시장도 있었던 겁니다.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 신분으로. 저는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시장은 기억하고 먼저 얘기를 꺼낸 것이지요. 제가 아차 싶어서 통화 끝나고 당시 청원인 명단을 찾아봤는데 진짜 있더라구요.(웃음)”

-혹시 박 시장과 예전부터 친분이 있으셨나요?

“사실은 안 지 오래됐죠. 제가 2000년에 국립암센터 원장이 되고 나서 직원들 교육을 위해 ‘명사 특강’이란 시간을 만들어서 매달 저명인사 1명씩 초청했는데, 2001년 7월 4일 제10회 특강에 박 시장이 연사로 왔습니다. (자료를 찾아보더니) 그때는 참여연대 사무처장 신분으로 와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삶’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군요. 박 시장이 요새 지하철 타고 다닌다는데, 그때도 자가용 안 타고 지하철로 왔어요. 비서도 없이 그냥 혼자 암센터로 걸어와서 인상적이었죠. 그렇게 알게 돼서 대화하면서 공감대도 많았고. 저를 신뢰하니까 담당 국장한테도 찾아가보라고 한 거죠.”

대장암 분야의 최고 권위자인 박 교수는 국립암센터 초대원장, 국립중앙의료원 초대원장 등을 지냈다. 국립암센터 원장 시절 청와대 및 국회의사당 내 흡연 금지, TV 드라마에서의 흡연장면 방영 금지, 담뱃값 인상 등을 제안해 관철시켰다. 2004년 11월 11일 국제단체인 ‘담배 없는 세상 동맹(ToFWA, Tobacco Free World Alliance)’ 설립을 주도했고, 2005년 10월 24일 프랑스 리옹에서 열린 세계보건기구(WHO) 산하 국제암연구소가 주관하는 세계 암센터 원장 회의에서는 담배 규제를 위한 ’리옹 선언‘을 제안해 채택되도록 했다.

-그래도 시에서 의견 수렴과 행정 절차를 밞아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정책인데, 갑자기 시장이 틀어버린 건 문제가 많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시민단체 출신의 한계가 드러난다’는 언론 비판도 있었고요.

“제가 아는 박 시장은 굉장히 신중한 사람인데 중요한 결정을 순식간에 즉흥적으로 할 사람은 아닙니다. 잘못 결정하면 본인한테 상처로 돌아가죠. 그렇지만 ‘박재갑이라는 사람이 무슨 일을 해왔는지 내가 안다’ 생각했으니까 제 얘기가 맞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봅니다. 갑자기 생판 모르는 사람이 뭘 보내면 그렇게 하겠어요? 참모들과 상의해서 한 거지, 참모들이 이건 아니다 라고 하면 못 하죠. 특히 서울시에서 그런 정책을 밀어붙이면 전국 지자체에서 다 따라하거든요. 엄청나게 큰 상징성이 있는 거죠. 그렇게 해서 흡연시설 안 만드는 걸로 결정하니까 박 시장이 칭찬도 많이 받는 것 같아요. 박 시장을 좋아하는 그룹도 있지만 싫어하는 그룹도 있잖아요? 제가 얼마 전 어떤 모임에 가서 헤드테이블에 앉았는데 싫어하는 그룹에서 나오는 얘기가 ‘박 시장 못마땅한데 그건 잘 했더라. 흡연시설 취소한 거는 잘한 거야’ 그러더라고요.”

-작년에 이명박 대통령에게 공개 청원도 하셨는데, 청와대에서는 뭔가 반응이 없었습니까?

“없어요. 아무 연락이 없습니다. 국민을 가장 많이 죽이는 원인에 대해 얘기하지 않으면 진정한 지도자가 아니라고 봅니다. 지금 우리 국민을 가장 많이 죽이는 원인이 뭡니까? 북한 괴뢰군입니까? 김정일입니까? 가장 큰 단일 아이템이 담배입니다. 집안의 내 자식이 죽어 가는데 가장이 가만히 있으면 그건 가장이 아닙니다.”

-박 교수님의 지도자론은 확고한 것 같습니다. 담배 문제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진짜 지도자라는.

“저는 대한민국 국민 입에서 담배가 없어지길 바라는 사람입니다. 빨리 국민들을 담배로부터 격리시키고 싶은 사람입니다. 1년에 국민 5만명을 죽이는 대량 살상무기는 합법적으로 놔둔 채 신종 플루 예방을 위해 손 씻기를 강조하고, 교통사고 사망률을 낮추기 위해 각종 규제책을 마련하는 우리 사회를 보고 있자면 온통 모순과 위선으로 가득 찬 세상을 살고 있는 것만 같아요. 진정한 리더라면 국민에게 이렇게 얘기해야 합니다. ‘담배는 독극물이자 마약으로 국민들에게 팔아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 우리가 대책을 짜서 담배를 팔지 않으려고 하니 흡연하는 국민들은 빨리 담배를 끊어주세요. 끊기 힘든 분은 금연클리닉에 오면 정부가 다 지원을 할 겁니다’ 이렇게 말이죠.”

박 교수가 냈던 담배 제조 및 매매 등의 금지에 관한 법률 입법 청원은 17대 국회 종료와 함께 자동폐기됐다. 박 교수는 다시 2008년 11월 11일 같은 청원을 18대 국회에 냈다. 담배를 제조하거나 매매, 알선하는 사람을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으로 처벌하며, 담배 농가에 대해서는 업종 전환 보조금 등 필요한 자금을 국가가 지원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18대 국회에서도 이 청원은 전혀 다뤄지지 않았다. 박 교수는 울분을 토했다.

“국회에 제대로 된 의원이 1명이라도 있으면 담배 정책이 이렇게 가지 않아요. 다른 건강과 관련된 운동은 하면 다 되는데, 왜 담배와 관련된 운동만 안 되겠어요? 담배 회사들의 엄청난 뒷돈이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담배 회사하고 흡연자들이 왁왁 거리면 자기 재선되는 데 도움이 안 된다고 보니까 국회의원들이 절대 안 움직이는 거죠. 18대 국회도 얼마 안 남아서 이제 그 사람들한테는 기대도 안 합니다. 담배 제조 및 판매의 법적 근거인 ‘담배사업법’이 잘못된 법이라는 결정이 나도록 조만간 헌법소원을 내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어요.”

인터뷰를 마치고 회사 사무실에서 박 교수의 책 ‘십중팔구 암에게 이긴다’를 읽어봤다. 담배의 무서움에 대해 구구절절 경고가 가득하다. 이런 대목이 눈에 들어왔다. “폐암 환자들의 투병 과정은 어떤 암환자들보다 참혹하다. 세상의 어떤 고통도 숨 못 쉬는 고통보다 괴롭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폐암 환자들을 볼 때마다 한다. 산소통을 연결해도 제대로 산소를 흡입할 수 없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면 환자도 안쓰럽고 가족도 안쓰러워 내 가슴이 타들어갈 지경이다.”

박 교수가 얼마나 절박한 심정 속에 갓 취임한 서울시장에게 항의 공문을 보내고 담당 실무자들과 줄줄이 통화했는지 좀 더 이해가 됐다. 박 교수가 생각하는 ‘진정한 지도자’ 상에는 예컨대 미국의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 시장이 해당될지 모른다. 블룸버그는 시장 재직 중이던 2006년 8월 15일 세계 금연운동을 위해 1억2500만 달러(약 1200억 원)를 기부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는 2001년 뉴욕 시장에 당선된 뒤 뉴욕의 주점과 식당에서 흡연을 금지하는 법안을 실행에 옮긴 바 있다. 블룸버그는 기부 성명을 통해 “담배는 세계의 주요한 살인자”라며 “흡연은 본인에게 해를 끼칠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피해를 주고 죽음에 이르게 한다”고 강조했다.

블룸버그처럼 박 교수를 만족시킬 만한 진정한 지도자가 한국에서도 나올 수 있을까? 박 교수는 내년 대선에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있다.

글=김호경 기자, 사진=강민석 선임기자 hkkim@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