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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시각-고승욱] 물수능 불수능

[데스크시각-고승욱] 물수능 불수능 기사의 사진

요즘 학원가에는 ‘정권 말에는 수능이 쉽다’는 루머가 돌고 있다. 온갖 괴담이 난무하는 마당에 70만명 가까운 학생이 동시에 치른 수능을 놓고 루머가 안 나올 수 없다. 이 루머는 ‘70만 예비 유권자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는 음모다’라는 식으로 발전한다. 내년 수능은 올해보다 더 쉬울 것이라는 예상도 따라붙는다. ‘대선이 끝난 다음에 합격자 발표가 있으니 기분을 좋게 해주려는 것이다’라는 말은 15만명 가까운 재수생을 염두에 두고 나왔을 터이다.

학력고사가 수능으로 바뀐 게 1994년이다. 99년에 만점자가 처음 나오면서 물수능이라는 말이 생겼다. 2000년에도 만점자는 있었지만 2001년에 비할 게 아니다. 당시 400점 만점을 받은 수험생이 66명, 380점 이상이 3만5000명을 넘었다. 만점을 받고 서울대에 지원했다가 떨어진 학생도 있었다.

2002년은 불수능이었다. 200점 만점이던 수능이 400점으로 바뀌면서 난이도 조절에 실패해 대학을 포기하고 군대에 간다는 말이 나왔던 97년보다 더 어려웠다는 평이 있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국무회의를 주재하며 “쉽게 출제한다는 정부의 약속을 믿었던 학생과 학부모에게 유감스럽다”고 사과했다. 지금도 딱히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은 최악의 불수능이 97년인지 2002년인지를 놓고 싸운다.

수능이 끝난 뒤 입시학원마다 나름대로 집계한 1등급 컷(등급 구분점수)을 발표하자 허탈해하는 수험생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정부가 영역별 만점자 1%를 약속하면서 은근히 걱정했는데 현실이 된 것이다. 영어는 두 문제 틀리면 2등급이다. 지구과학Ⅱ는 50점 만점인데 2등급 컷이 48점이다. ‘악’ 소리가 절로 나온다. 시험 잘 봤다고 기분 좋았는데, 친구들도 성적이 좋다고 한다. 서로 격려하지만 속마음은 걱정이다.

물수능은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의 소신이다. EBS에서 설명해준 문제를 그대로 출제하는 방식으로 쉽게 내면 사교육비가 줄어들 것이라는 설명을 곁들인다. 그런데 현실은 다르게 흘러간다. 정시 대신 수시가 가열되고, 갑자기 논술학원이 돈을 번다. 서울 강남의 논술학원들은 보통 사흘 여섯 시간에 100만원쯤이다. 지방학생은 서울에 올라와 고시원에서 며칠을 보내며 학원에 다닌다.

정부 입장에서 서울대나 연세대에 어떤 학생이 입학하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대학은 고교과정을 충실히 이수한 학생이라면 누구든 받아서 열심히 가르치고,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길러내면 된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수험생 개인 입장에서는 어느 대학에 가느냐보다 중요한 게 없다. 일류대학에 가느냐 못 가느냐로 인생이 달라진다. 그 괴리가 불필요한 변별력 논쟁으로 이어진다. 청소년기에 꿈을 키우고, 적성을 고려해 전공을 택하라는 교육당국에 그래도 더 이름 있는 대학에 가고 싶어 하는 학생들은 불만을 터뜨린다.

지금 수능은 상대평가다. 표준점수와 백분위 점수가 있다. 물수능이든 불수능이든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다. 내가 쉬우면 남도 쉽고, 내가 어려우면 다 어렵다. 교육당국은 수능이 절대평가로 바뀌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자격시험처럼 만들겠다는 생각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시험 잘 보는 학생을 뽑아 각종 고시에 더 많이 합격시키겠다는 대학, 시험 점수 높게 나오는 능력만이 엘리트 집단 편입 여부를 가르는 사회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학생들은 힘들다. 수능의 쉽고 어려움이 정책수단으로 사용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난이도를 사전에 예고하고, 만점자 1%가 목표라고 말하는 자체가 난센스다.

고승욱 사회부장 swk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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