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엄상익] 법의 포장만 선물 받은 문인들 기사의 사진

임대아파트에서 생명이 소멸해 가는 문인을 만났다. 뼈만 남은 것 같은 앙상한 모습으로 그는 정물같이 앉아있었다. 폐암말기에 성대까지 다쳐 쇳소리가 났다. 인근중학교 급식반에서 누룽지를 대주고 성당에서 된장국과 나물을 보내준다고 했다. 극빈자가 받는 사십여 만원의 생계보조비가 그의 생존의 원천이었다. 그의 경력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는 한국일보와 대한일보의 신춘문예에 동시 당선된 문학적 천재였다. 자동차 정비공으로 낮에 일하고 밤에 글을 써서 문단으로 데뷔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김동리 선생의 수제자이기도 했다. 그의 삶은 차라리 수도자적 고행이었다.

잡지사 월급 백만원으로 아이들을 키우고 가족이 연명했다. 몇 번에 나누어 찔끔 찔끔 나오는 월급이었다. 극한의 상황 속에서 그는 소설을 썼다. 가난해도 영혼은 풍성한 것 같았다. 그는 바람처럼 돌아다녔다. 인도도 돌아다녔다. 동전 하나면 밥 한 그릇이 해결됐다. 그 모든 행위가 정신세계의 축적이었다. 임대아파트를 얻었다. 절같이 조용하고 좋았다. 가스비와 전기요금도 저렴했다. 그는 평생 쌓은 내공을 바탕으로 육십부터 본격적인 창조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 순간 죽음의 사신이 그를 찾아온 것이다. 그는 삶의 종말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태도였다. 다만 세상을 정리할 시간이 제대로 주어지지 않은 걸 안타까워했다.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의사가 암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문인들의 죽음의 과정은 그 자체가 삶의 마지막 작품일 수도 있다. 소설가협회장을 지낸 고 정을병 선생의 마지막 얼마간의 시간을 친구가 되어 만난 적도 있다. 아내도 아들도 저 세상으로 먼저 보내고 그 역시 암으로 투병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는 젊은 시절 문학을 위해 하루 한 끼만 먹기로 결심했다고 말했었다. 문인으로 살고 싶으면 그렇게 연명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칠십대 중반의 그는 자신이 문학을 시작할 때 세운 원칙을 고수했다. 그는 죽어가는 순간도 “나 좀 아파요”라고 전화로 말하면서도 누구도 집으로 찾아오는 건 사양했다. 개결한 자존심을 가진 인물이었다. 자신은 죽어도 국립중앙도서관에 분신인 소설 70권으로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고 내게 자랑했었다.

학생들에게 주는 장학금은 넘쳐나는데 영혼의 밭에 씨를 심는 문인들에 대한 지원은 빈약하다. 자신이 선택한 일이 아니냐며 외면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그건 아니다. 진정한 일류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자동차나 스마트폰뿐만이 아니라 노벨문학상을 받고 소설이 수출되어야 한다. 훌륭한 작가들이 많이 나오는 나라의 국민들은 깊고 신중하다. 작가들이 영혼의 밭을 비옥하게 하기 때문이다. 좋은 나라는 한 작가가 작품에 일생을 걸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다.

한국고용정보원의 2009년 통계를 보면 예술인이 약18만 명이다. 그들 중 월평균수입 백만원 이하가 62.8%를 차지한다. 대다수는 극심한 경제적 고통 속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예술계의 구조는 기형적이다. 삼각형 위에 첨탑이 더해졌다. 그 첨탑부분에 극소수의 성공한 예술인들이 수입의 전부를 독점한다.

정치권에서 무지개빛의 화려한 공약을 내걸었었다. 한나라당은 16대 대선에서 문화예술인복지조합설립을 공약했다. 4대 보험 개선을 하고 예술인의 사회적 신분보장을 위한 제도를 도입하겠다며 정책을 발표했다. 예술인의 최소생계를 위한 법안을 마련하겠다는 총선공약도 나왔었다. 지난 10월 28일 예술인복지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그러나 막상 문인들은 대상이 아니다. 근로자가 아닌 창작을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산재보험의 대상이 아니다. 일하다 다쳐도 도움을 받을 수 없다. 고용보험대상도 되지 않는다. 6개월 이상 보험료를 내야 하는데 비정규직으로 시간제 일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결국 문인들은 사회안전망적인 혜택과 배려의 사각지대에 머물고 있다. 예술인 복지법의 화려한 조문에 비해 적용되는 현실이 너무 초라하다.

엄상익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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