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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호(1971∼ )

노인을 붙잡아놓고 길자는 국수를 맙니다

노독이 뿔처럼 여문 저녁 기슭에 눈이 내립니다

국수 한 그릇을 비우는 동안 노인은 고개를 한 번 들지 않습니다

노인이 슬그머니 놓고 간 껌을 불어 길자는 저녁을 팽팽히 늘립니다

그리움도 없이 살면서 자꾸 창밖만 내다보는 병은 겨울에 가깝습니다

한 자리에 고이는 일 없이 흐르는 가문 울음처럼 눈이 내립니다

겨울이 지나면 국수집 길자네도 없습니다


재개발지구 국수집 길자가 창밖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길자는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국수 한 그릇에 허기를 달래고 멀어져가는 노인의 등일까. 눈이 흩날리는 겨울 풍경일까. 그럴 수도 있고 어떤 심연을 응시하고 있을 수도 있다. 창밖에서 눈을 맞고 있는 심연이 길자에게 묻는다. “길자야, 너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거니?” 길자의 입술이 들썩인다. “겨울이 지나면 나는 이미 여기에 없어. 그때 너는 내가 앉아 있던 의자를 내려다보면서 울 거야. 아주 슬피 울 거야….”

정철훈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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