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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 (1958~ )

단풍 든 나무의 겨드랑이에 햇빛이 있다. 왼편, 오른편,

햇빛은 단풍 든 나무의 앞에 있고 뒤에도 있다

우듬지에 있고 가슴께에 있고 뿌리께에 있다

단풍 든 나무의 안과 밖, 이파리들, 속이파리,

사이사이, 다, 햇빛이 쏟아져 들어가 있다

단풍 든 나무가 문을 활짝 열어 제치고 있다

단풍 든 나무가 한없이 붉고 노랗고 한없이 환하다

그지없이 맑고 그지없이 순하고 그지없이 따스하다

단풍 든 나무가 햇빛을 담쑥 안고 있다

행복에 겨워 찰랑거리며

싸늘한 바람이 뒤바람이

햇빛을 켠 단풍나무 주위를 쉴 새 없이 서성인다

이 벤치 저 벤치에서 남자들이

가랑잎처럼 꼬부리고 잠을 자고 있다


나무들은 불타오른다. 노랗게, 붉게, 환하게. 남산의 11월은 아직도 따뜻하고 행복이 찰랑거린다. 그러나 그 너머에 무언가 있다. 싸늘한 바람이 서성이는 이 벤치 저 벤치에서 꼬부려 잠을 자고 있는 남자들. 정물(靜物)의 시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따뜻함 속에서 잠든 태아(胎兒)일까, 아니면 죽음의 예감일까. 11월은 저녁 무렵의 텅 빈 복도와 같은 계절이다. 방과 후 혼자 실기실에서 실습을 하다 늦게 교실을 나설 때 스멀스멀 깔리기 시작하던 텅 빈 복도의 저녁 어스름. 아직 겨울도 아니고 가을도 아닌, 겨울과 가을 사이에 가려져 있는 시간이라 더 오슬오슬해진다. 그러나 지금이다. 칡뿌리 속으로 알이 배이고 곰은 겨울잠을 자기 위해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는 잉태의 시간.

임순만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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