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말걸기-이영미] 아프니까, 정치 기사의 사진

출판가 보릿고개라는 11월 비수기. 위축된 신간시장이 올해는 유독 쪼그라들었다. 스티브 잡스 전기 탓이다. 출판사들은 ‘잡스만은 피하자’며 오래 준비한 야심작을 12월로 미뤘다. 선택은 현명했던 걸로 보인다. ‘스티브 잡스’는 나머지 책들을 ‘올킬’하며 한 달 만에 40만부가 팔렸다. 출판사가 “현기증 난다”고 고백한 광속이었다.

그렇다고 ‘잡스 쓰나미’를 버텨낸 책이 없는 건 아니다. ‘나꼼수 군단’의 책들이다.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나꼼수)’ 출연진들은 잡스 바람 속에서도 선전했다. 좌장격인 김어준의 ‘닥치고 정치’는 온·오프라인 서점 종합 베스트 1∼3위를 오르내리며 30만부가 나갔다. 뒤를 잇는 건 시사평론가 김용민이다. 5개월간 무려 3종의 책(‘나는 꼼수다 뒷담화’ ‘조국 현상을 말한다’ ‘보수를 팝니다’)을 내 12만부를 팔았다. ‘달려라 정봉주’는 출시 3일 만에 2만부, 2008년 나온 김어준의 ‘건투를 빈다’는 새삼스럽게 3만부가 팔려나갔다. 여기에 나꼼수에 출연했던 김용옥의 ‘중용 인간의 맛’까지 합치면, 나꼼수라는 단일 브랜드가 두 달간 팔아치운 책은 무려 50만부에 육박한다.

남자 4명의 뒷방 수다가 50만부의 ‘판매파워’를 키웠다는 건 기억할 만한 현상이다. 책이라는 지극히 보수적 매체에서 가장 일상어에 가까운 구어체로 독자를 사로잡았다(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는 점에서 그렇다. 더불어 주목할 건 ‘50만’이란 숫자가 발신하는 신호다.

50만 명이라면 애서가 50만 명일 수는 없다. 1년에 고작 한두 권, 많아야 서너 권을 사는 독자. 독서의 중산층이 움직였다는 얘기다. 베스트셀러가 말하는 건 독서대중의 움직임이라는 얘기다. 지난해부터 그들이 만들어낸 베스트셀러의 계보는 이렇게 이어진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누적 판매부수 130만부)∼장하준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50만부)∼김난도의 ‘아프니까 청춘이다’(150만부)∼문재인의 ‘운명’(30만부)∼‘닥치고 정치’.

공정한 사회가 무엇인지 고민하다 자유시장경제의 함정에 눈을 뜬 이들은 20대 ‘알바’ 세대의 좌절이 모두의 불행일 수 있다는 데 깊이 공감했다. 아픔을 공유한 뒤 행보는 단호해졌다. 뚜벅뚜벅, 독자들은 정치의 영역으로 걸어 들어갔다. 집단행동의 첫 신호는 ‘운명’이었을 테고, 이제는 ‘닥치고 정치’를 외칠 용기를 내게 됐을 것이다. 이 정도라면 한 무리의 성인들이 해나간 2년 과정의 ‘자기주도 정치학습’이라고 해야 하나. 지난 2년 독자가 그린 학습의 궤적은 뚜렷하다.

독자 다수가 정치를 말하는 건 분명 새로운 현상이다. 2000∼2006년 100만권 이상 팔린 책 95종 중 정치·사회 서적으로 분류될 책은 한 권도 없었다(‘21세기 한국인은 무슨 책을 읽었나’). 3분의 2를 차지하는 60여종은 ‘봉순이 언니’ ‘반지의 제왕’ 등 국내외 문학. 그 뒤가 경제경영(40종), 수필류(37종) 등이다.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로마인 이야기’ 같은 인문 책도 있지만, 이들 책이 바라보는 건 과거일 뿐 현재의 정치 사회적 현실은 아니었다.

예스24의 일일 베스트셀러를 보면, ‘닥치고 정치’ ‘달려라 정봉주’가 ‘스티브 잡스’를 누르고 27∼29일(전일 기준) 3일 연속 1, 2위를 차지했다. 사회성 강한 책이 유독 잘 팔리는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는 지난주 집계에서 잡스가 2위로 내려앉았다. 1위는 ‘닥치고 정치’였다. 뒤집어진 순위가 물대포가 동원되고 경찰서장이 두들겨 맞았던 지난주 시내 중심가 시위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장담할 수 있는 건 있다. 당분간 많은 이들이 가장 재밌게 읽을 책. 그건 정치서적이 될 모양이다.

이영미 문화생활부 차장 ym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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