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순만 칼럼] 유럽의 쇠퇴를 생각한다 기사의 사진

“복지는 ‘거룩한 부채’라는 인식이 없다면 어떤 제도라도 성공하기 어렵다”

대화가 가능한 정치, 대학원까지의 무상 교육, 정부와 사회의 투명성, 기업의 윤리의식. 게다가 가는 곳마다 관광 명소…. 유럽은 세계 많은 나라들의 꿈이었다. 유럽보다 잘산다는 일본도 부러워하는 곳이다. 그 유럽의 위기가 심상치 않다. 자고나면 국가 신용등급이 하락하고, 한국의 ‘개미’들도 디폴트 바람이 어디서 몰아칠지 걱정하는 날들이다.

이런 유럽의 위기에 대한 논의는 많다. 유로 단일통화체제의 제도적 결함이 우선적으로 지적되지만, 유럽형 복지를 도입하고자 하는 열정과 이를 막아내고자 하는 냉정이 우리 사회에서 팽팽하게 격돌하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국내에 소개된 독일의 노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의 저서 ‘아, 유럽’은 하나의 시사점을 준다.

국가마다 편차를 보이는 국경을 넘어 유럽 통합을 실현하고 다양한 가치를 존중하는 것을 명문화함으로써 민주주의가 심화된다고 보는 것은 하버마스의 오래된 지론이다. 지구촌을 지배하는 워싱턴의 단선(單線)적 힘에 맞서기 위해 유럽공동체 공론의 장을 주문해 왔던 그는 이제 유럽이 관료, 기업, 금융계의 힘에 장악됐기 때문에 통합의 힘이 확대·심화되기 어렵다고 우울한 결론을 내린다.

복지냐 포퓰리즘이냐, 한·미 FTA 찬성이냐 반대냐와 같은 이분법이 지배하는 한국의 현실로서는 아직도 먼 이야기지만 하버마스의 의견에 한 가지 덧보태야 할 것이 있다고 본다. 복지는 ‘거룩한 부채’라는 의식이 밑받침되지 않으면 물질에 현혹되기 쉬운 인간의 속성 때문에 어떤 제도도 성공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주는 사람이든 받는 사람이든 복지를 거룩한 빚으로 바라보지 않으면 진정한 나눔은 존재하기 어렵다. 그리스 사태가 대표적인 예다.

그리스의 적자를 독일의 흑자로 메워주는 것은 당분간 독일의 무역 흑자를 늘려주기 때문에 양국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현금 자동인출기가 아닌 이상 독일의 지원은 한시적일 수밖에 없다. 유로 통화권을 따라갈 수 없는 그리스는 자국의 노력으로는 빚 청산이 어렵기 때문에 재정 긴축에 찬성하지 않는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그리스 사태의 본질이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이 ‘네 이웃의 집(소유)을 탐하지 말라’고 한 성경의 열 번째 계명이다. 내용은 간단하지만 의미는 깊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the Westminster Large Catechism)’은 이 계명이 요구하는 조건으로 ‘우리 자신이 가진 그대로 만족할 것’과 ‘인자한 마음을 갖고 이웃의 복지와 번영을 우리의 것인 양 감사할 것’을 들고 있다.

대요리문답은 현재 가진 것에 만족하면서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합법적인 방법으로 노력해야 참된 부요함을 얻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웃의 잘됨에 감사하는 것은 자신의 부요함을 이루는 것 못지않게 어렵다. 타인의 불행에 대해 함께 아파하는 것은 보통의 미덕이다. 그러나 타인의 행복이나 복지에 대해 진정으로 함께 기뻐할 수 있는 것은 그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미덕을 요구한다.

이런 덕목을 밑바탕으로 하는 시스템이라야 부패하지 않는다. 복지는 의존적인 것이다. 베풀 수 있는 사람에게는 어려운 이들을 지키고 돌보겠다는 의무감이 있어야 한다. 받는 사람은 재물을 나눠주는 것에 대한 거룩한 부채의식이 있어야 한다. 엄청난 노동력으로 바닷물의 침식을 막아낸 네덜란드인, 국토 대부분이 바위 언덕인 땅에서 번영을 구가한 스코틀랜드인, 그리고 엄청나게 추운 겨울을 이기고 땅을 개척한 미국 뉴잉글랜드 지방 사람들이 이런 정신을 바탕으로 잘 사는 사회를 만들었다.

함께 사는 세상에 대한 이상은 고귀하고, 확대될수록 좋다. 그러나 서로를 돌보며 상호 빚지고 있다는 인식이 없는 상태에서는 그 이상을 실현시킬 수 없다. 그래도 유럽은 여기까지 왔다. 다양성과 복지사회 도입 부분부터 극단적으로 분열되고, 그 와중에 예산이 줄줄 새는 우리 사회가 걱정스럽다.

수석 논설위원 so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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