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 옛 그림] (99) 차 향기 번지는 붓글씨 기사의 사진

한자의 글꼴은 난삽하다. 프랑스의 문인 장 콕토는 한탄한다. “마치 손발을 버둥거리는 듯, 비참한 움직임이 비극적이다.” 그의 눈에는 글자의 뜻보다 모양이 먼저 들어왔다. 아닌 게 아니라 몸을 비비 꼬면서 고통을 호소하는 필획은 서양인에게 비명처럼 들릴 수 있겠다. 초서는 더 심하다. ‘소금밭을 지나간 지렁이의 흔적’이라고 한 이도 있다.

서예는 어렵다. 침묵하는 먹과 대답 없는 여백이 만든 구도는 독특하다. 하여 요령부득의 관념적 유희로 여겨지기도 한다. 서체를 조형으로 보면 달라진다. 붓이 글씨를 더듬어 나간 자취는 오묘하다. 진하고 옅은 먹, 굵고 가는 획, 빠르고 느린 붓놀림은 한문에 어두운 현대인에게조차 감각적인 매력을 안긴다. 붓글씨는 무엇보다 디자인적 요소가 물씬하다.

추사 김정희의 글씨 한 점을 보자. ‘죽로지실’이라고 썼다. 추사가 친구의 다실에 붙여준 이름인데, 곧 ‘대나무 화로가 놓인 방’이다. 뜯어볼수록 생김새가 신기하고 기막히다. 척 봐도 차 달이는 김이 모락모락 난다. 대나무(竹)는 곧은 것과 비틀린 것이 섞였고, 화로(爐)는 다리굽이 네 개인데 불씨(火)가 겨우 살아있다. 지(之) 자에서 향기로운 훈김이 피어오르고, 실(室)에서 찻주전자가 놓여있는 방이 금세 떠오른다.

추사의 천재성은 댓글을 달 여지가 없다. 예서에 바탕을 둔 그의 글씨는 그림도 못 따라간다. 눈 밝은 서양화가는 붓글씨의 조화(造化)에 감을 잡는다. 프랑스의 추상화가 장 드고텍스는 서예를 그림의 교범으로 삼았다. 그의 주장은 놀랍다. ‘하나의 획으로 끝내고 덧칠하지 마라. 여백의 효과를 살려라. 재료를 물질로 보지 마라. 극소에서 극대의 효과를 끌어내라.’

붓글씨의 세계가 무릇 그러하다. 추사의 붓질에서 묵향이 번진다. 따듯한 차 한 잔이 익어가는 사이, 번뇌는 멈추고 망상은 오간 데 없다.

손철주(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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