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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인(1967∼ )

공장 밖으로 심부름을 나온 달빛

심부름을 나온 바람,

심부름을 나온 소녀가 슈퍼에서 쪼글쪼글한 귤을 한 봉지 산다

슈퍼 주인 할아버지가 자기 방식으로 귤을 센다

늘어진 전깃줄에서 나온 백열등이 귤을 또 센다

초코파이가 들어와 부풀어 오른 비닐봉투 배가 불룩하다

‘이게 모두 얼마예요’ 그래서 ‘이게 모두 다 얼마예요’

‘이게 모두 얼마예요’와 ‘이게 모두 다 얼마예요’라는

말을 들은 귤과 초코파이의 몸이 욱신욱신 속이 상해서 비닐봉투에 들어 있다

자정이 넘어서 귤을 벗기고 있는 소녀와 소녀를 벗기고 있는 기계소리가 아프다

‘오늘밤이 지나면 얼마를 줄 거예요?’

귤을 벗긴 이의 손톱은 달을 파먹은 것처럼 노랗게 물이 들었다

무심한 달빛이 공장 지붕을 아프게 지나간다


노란 귤껍질에 싸인 우화처럼 읽히지만 껍질을 벗겨보면 그 안에는 공장에서 심부름 나온 소녀의 피곤한 노동이 스멀거리고 있다. 공장에서는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보잘것없는 소녀이지만 그 역시 엄연히 인간다운 삶을 꿈꾸는, 감성을 지닌 존재임을 시인은 환기시키고 있다. 오늘의 노동 강자여, 그대 이름은 진정 소녀인가. 레닌이 부르짖었던 노동 강자는 오늘에 이르러 사회적 약자다. 귤껍질을 벗기는 손톱에 든 노란 즙은 이 땅의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애환에 다름 아니다. 눈여겨볼 부분은 그럼에도 시인은 이들 약자의 슬픔을 눅눅함 없이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거창한 담론을 부르짖지 않고도, 박노해 식의 격정 없이도 시가 차분한 정적 속에서 뇌리에 쏙 들어오는 것 자체가 언어적 마술이다.

정철훈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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