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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시] 거짓말을 타전하다


안현미 (1972~ )

여상을 졸업하고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아현동 산동네에서 살았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사무원으로 산다는 건 한 달치의 방과 한 달치의 쌀이었다 그렇게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 살았다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도 슬프지는 않았다 가끔 대학생이 된 친구들을 만나면 말을 더듬었지만 등록금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던 날들은 이미 과거였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비키니 옷장 속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출몰할 때도 말을 더듬었다 우우, 우, 우 일요일엔 산 아래 아현동 시장에서 혼자 순대국밥을 먹었다 순대국밥 아주머니는 왜 혼자냐고 한 번도 묻지 않았다 그래서 고마웠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여상을 졸업하고 높은 빌딩으로 출근했지만 높은 건 내가 아니었다 높은 건 내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 꽃다운 청춘을 바쳤다 억울하진 않았다…(중략)…불 꺼진 방에서 우우, 우, 우 거짓말을 타전하기 시작했다 더듬더듬, 거짓말 같은 시를


2연으로 된 산문시. 지면 관계상 두 번째 연의 중간 부분을 뭉턱 들어낼 때 여동생의 살점을 들어내는 것만큼이나 아팠다. 여상을 졸업하고 적은 월급으로 아등바등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여자. 산동네 재래시장에서 홀로 순대국밥을 먹는 또순이의 그림이 선연하게 떠오른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은 이럴 때 하는 것이다.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의 ‘절규’를 연상시키는 ‘우우, 우, 우’ 뒤에 탄생하는 것이 있지 않을까. 있다. 더듬더듬 타전하는 것. 시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시는 하나의 세상 창조. 홀로 한 세상을 만드는 사람은 값지다.

임순만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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