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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代 125년 서울 살다… H·언더우드 선교사 증손자 피터 언더우드

4代 125년 서울 살다… H·언더우드 선교사 증손자 피터 언더우드 기사의 사진

“당신은 왜 한국에 남아 있나요.”

이 질문은 피터 언더우드(57)의 심기를 건드린 것 같았다. 그는 우리나라 땅을 처음 밟은 개신교 선교사 호러스 언더우드의 증손자다. 언더우드 1∼3세는 죽어 한국에 묻혔고 4세는 피터 언더우드만 남아 사업을 하고 있다. 그는 최근 연세대 재단 이사회가 정관에서 기독교 교단 파송 이사 조항을 삭제하자 설립자 가족 대표로 항의성명을 발표했었다.

발끈하면서 그는 말했다. 마늘 냄새가 났다.

“왜, 빨리 나가라고? 좀 이상한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모님이 한국에 살고 형이 한국에 살기 때문에 내가 사는 건 아니거든요. 나는 여기서 자라났고 서울이는(서울은) 내 고향입니다. 우리 가족 다 같이 125년 서울에서 살았습니다. 한국사람 중에서 4세대 서울에서 산 사람은 많지 않을 거예요.”

그는 한국말을 잘했지만 조사 ‘을(를)’은 거의 쓰지 않고 ‘은’ 대신 ‘이는’을 주로 썼다. ‘것이다’는 ‘거이다’로 발음했다.

-한국인이 한국에 사는 것과 같단 말인가요.

“그렇죠”라며 그는 반격했다. “왜 부산으로 안 갔어요? 왜 해외에 안 갑니까. 똑같죠. 기자님하고 나하고 무슨 차이가 있어요.”

-당신 국적은 미국이잖습니까.

“우리 가족 여권 색깔이 다 달라요. 와이프 호주, 딸 캐나다, 우리 어머니 원래 영국이었고. 근데 아버지 어머니는 서울에서 태어났고 우리 다 한국에 살았는데 국적 관계없이 이거는 우리 고향이에요. 사실 미국에 갈 데도, 관심도 없고. 아니 뭐 좋은 자리가 있어서 소개하면 한번 생각해보겠지만.”

3남 중 막내인 그는 아버지가 미국에서 대학원을 다닐 때 태어났다. 3개월 만에 귀국해 서울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녔다. 대학과 대학원은 미국에서 유학했다.

-그래서 어느 나라 사람이라는 말인가요.

“한국사람이는 이해하기 좀 힘들 거예요. 서양 문화는 출생하거나 오래 사는 지역이면 그 나라 사람 되는 거이라고 생각하는데 한국은 그거 아니고 유전이에요. 그래서 한국사람 생각하는 국적하고 서양사람 생각하는 국적이는 일치하지 않아요. 나는 짬뽕이에요.”

-가족 중에 귀화한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상하게. 근데 그거 쉽지 않았거든요. 나는 영구(거주)자인데 됐는지가 2년밖에 안 됩니다.”

-한국 국적 가지려고 노력해 봤나요.

“나는 안 했어요. 일단 영주권 있으니까 고맙고. 우리 언더우드가 중에서 유일하게 나만 그렇습니다. 아버지도 그거 하려고 했는데 못했어요. 한국에서 출생도 했고 6·25에서 쌈했고 통역도 했고 연세대 50년 이사도 했고 대통령한테 상 받았고. 이런 사람도 영주권 안 주는데. 인요한(존 린튼·세브란스병원 가정의학과장), 그 친구도 국적 바꾸려고 노력하는데 힘들다고. 그렇게 쉬운 거 아니에요.”

-당신 가족은 한국에 오래 살았고 한국을 사랑했다는데, 왜 한국인과 결혼하진 않았나요.

“우리 작은아버지는 한국여자하고 결혼할 뻔했는데 6·25 때문에 만나지 못했어요. 전쟁 나서 그 약속에 가지 못한 거예요. 저도 한국여자하고 데이트한 적은 있지. 근데 이뤄지지 못한 거는 문화 차이가 있습니다. 또는 결혼할 때 사는 수준은 어느 정도 맞아야 되는데 아마 3세까지는 상당히 제한돼 있었어요. 제가 73년도에 결혼했는데 그때 군인 말고 국제결혼은 드물었을 거예요. 외국남자 한국여자 같이 돌아다니면 욕하는 사람도 있었거든.”

그에게 유년의 기억을 물었다. 그는 되받아치는 데 재미가 붙었는지 “먼저 물어볼게요. 기자님은 고향에서 기억 남는 거 뭐예요?”라고 몰아붙였다. “이사를 하도 다녀서 짐 싼 기억밖에 없다”는 남루한 추억을 내주고서야 대답을 들었다.

“나는 어렸을 때 시골에 살았고 지금은 도시에 사는데 집은 같은 집이다, 이렇게 얘기하거든? 제가 어렸을 때 연희동이 다 논밭이었어요. 다 초가집이고. 동네 애들이랑 개천에서 개구리 잡고, 한번은 뛰어가다 똥통에 빠져 들어가지고 집에 가서 야단맞은 것도 기억하고. 쌈도 했지 뭐.”

그는 때 이른 백발에 코가 높고 눈은 파랬다. 창백한 미간에는 주름 두 줄이 깊게 잡혀서 백자(白瓷)에 흐르는 실금처럼 보였다.

-생김새가 달라서 어울리기 어렵지 않았나요.

“피부색깔이나 이거보다 아시다시피 한국이는 좀 못 사는 나라였어요. 우리가 돈 많지 않았지만 당시에 한국사람이 너무너무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에 그거는 더 큰 베리어(barrier·장벽)가 됐었어요.”

-그 친구들과 지금도 만나나요.

“많이 흩어졌어요. 내 생활 중에서 아쉬움이라고 그럴까요? 지금은 달라요. 우리 딸이 고등학교 졸업한 지가 이제 10년 돼 가는데 페이스북 이런 거로 친구 다 통하고 있어요.”

-한국에서 벌어지는 사건사고를 보면 누구 일처럼 느끼나요.

“음, 좀 섞여 있죠. 좀 혼합돼 있는데 나는 그게 외국사람 앞에 보이면 창피스러워요. 안 보이게 좀 덮어버리려고 하지. 예를 들어서, 국회에서 최루탄 터진 거. 저도 국가브랜드위원회 위원인데, 이런 거 하나 터지면 막바로 BBC 프런트 페이지에 들어가고. 우리 많은 노력하는데 10배 100배 영향 있는 사건 터지니까 아이 씨 아깝지. 아직 배울 거 많구나, 아직 멀었구나 생각해요.”

-반미 시위를 보면 마음이 어느 쪽으로 기우나요.

“둘 다는 아니에요. 미국 그 나라도 안 좋은 일 많이 했었습니다. 그거 비판해가지고 이거는 잘못됐다고 좀 고치라고 하는 거이면 나는 100% 동의합니다. 그치만 반대하기 위해 반대하는 경우가 많아요. 우리 편이 이런 얘기 하는 거니까 따라서 한다고 하는 거면 ‘에이 바보들’ 이렇게 생각해요. 우리 편이니까 맞다, 그거는 벗어나야 되는 문화예요.”

-당신은 한국 문화를 얼마나 이해하나요.

“내가 아는 거는 너무너무 없어가지고 매일 매일 배운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한국사람보다 더 확실하게 한국 문화 이해한다는 것도 사실이에요. 20년 넘게 서양사람한테 한국 문화 설명하고 소개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이해하기 위하여 애 좀 썼고 공부했고 생각해봤고 친구하고 토론해봤으니까.”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고 노래방에 가서 열창도 합니까.

“노래는 잘 못 부릅니다. 근데 취했으면 노래 부르는 것도 가능하죠. 한 10년, 15년 전 그때는 소주 삼겹살 이거 너무 많이 했어요. 제가 진짜 반갑게 만났던 문화 변화가 한국사람도 이제 건강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와인도 하고 다양하게 된 거예요.”

-성격도 한국인처럼 급합니까.

“그렇습니다. 직원한테 물어보세요.”

한 직원에게 물어보니 화들짝 놀라며 “어떻게 아셨어요? 정말 급해요. 천천히 하라고 해놓고 자꾸 ‘아직 안 했어?’라고 물어요. 제가 말했다고 하지 마세요”라고 했다.

“제 문화는 좀 혼합이에요. 한국 문화 100%도 아니고. 미국에 가도 미국사람은 난 누군지 몰라요. 문화 코드가 너무너무 달라서. 난 중간 어디에 있고, 나라 없는 사람이에요.”

-당신 가족이 전한 기독교가 요즘 한국에서 욕 많이 먹고 있습니다만.

“우리 증조할아버지가 120, 130년 뒤에 교회가 어떤 방향으로 간 거 알고 있었으면 한국으로 안 왔을 거이다, 나는 농담으로 말합니다. 한국 교회는 파벌싸움이 너무 심하고 예수님이 우선돼야 하는데 자기네 입장이나 위계질서 이런 게 앞서 가 있는 거 같습니다. 답답한 마음 많습니다. 연세대 문제(교단 파송이사 배제)도 많은 책임은 교회한테 있습니다. 꼼짝도 못하게 깨끗한 생활 하고 있었으면 그 사건은 이뤄지지 못할 거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까지 기자는 그를 한국에서 몰아내려는 사람처럼 물었다.

-은퇴 후 아내 고향인 호주로 갈 계획이라던데, 언제 은퇴합니까.

“그건 매번 와이프하고 쌈하고 있는데 운이 좋게 우리 와이프, 스포츠 좋아합니다. 구경하는 거. 우리 겨울 올림픽(평창동계올림픽) 2018년도에 땄으니까 나는 하나님한테 고맙다고 기도했어요. 그때까지 있는 거는 확정돼가지고.”

글 강창욱 기자·사진 김지훈 기자 kcw@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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