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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시] 사양(斜陽)의 가족사진을 찍다


고형렬(1954∼ )

날개들 떠나기 시작했다

수돗가에서 두 철 까맣게 탄 도채장이들

분(盆)째 거실로 들인 남향의 오후

자 사진을 찍자, 저 멀어지는 빛으로.

이 시대의 시인은 없지만 우리끼리 시인이다

시인들이 말을 다 잃어버리고 있지만

우리만은 말을 물고 있어,

오지 않는 것들을 기다리지 않는다

이상했지 한로 상강 간은 소리가 없더라?

남양주 동산에 해가 지는 마음의 밑바닥에

사양을 대고 기념사진을 찍는다,

자 나를 똑바로 보아, 하나 둘 셋, 찰칵.

아리고 슬픈 소리는 유리창 앞에서 끊어졌다

잠 속에서 해가 지나간다


한 해가 저문다. 뉘엿뉘엿 지는 석양. 채색을 직업으로 삼는 도채장이는 지난 여름과 가을 한 철 수돗가에 내놓았다가 까맣게 타버린 화분일 수도, 세상에 나갔다가 멍들어 돌아온 시인 자신일 수도 있다. 시인은 24절기 가운데 한로(寒露)와 상강(霜降)이 들어 있는 10월 내내 말을 잃어버리고 살았나 보다. 분을 거실로 들인 오후 비스듬히 실내로 들어오는 석양빛에 기대어 마음의 사진을 찍는다.

꿈결인 듯 잠결인 듯 스러지는 빛, 멀어지는 빛. 일장춘몽보다 더 아련한 늦가을 저물녘. 서산 너머 지는 햇살이 유리창을 통과할 때, 아직 오지 않은 말을 물고 있는 시인의 슬픈 심사는 끊어지고 있다. 차라리 빛바랜 도채장이의 냉가슴에서 시가 탄생한다. 모든 사적인 언어는 무인도 위에 버려지지만 시는 이상하게도 우리를 가깝게 만든다. 시는 말의 흐름과 속도에 제동을 걸고 끊음으로써 우리에게 기회를 준다.

정철훈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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