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곤 칼럼] 조문은 또 그렇다 하고… 기사의 사진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고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시신이 안치된 평양 금수산기념궁전에 가서 조문을 하고 왔다. 이 여사의 경우 아들 김홍업·홍걸 형제, 큰며느리에 장손까지 대동했다. 북측 김 위원장이 조문특사를 보냈던데 비해 김 전 대통령측은 유족들이 직접, 그것도 다섯 명씩이나 조문을 갔다. 하긴 개인 차원의 조문이니까 누가 갔든 그게 문제될 것은 없겠다.

인민에 대한 도리가 더 중하다

야당과 사회 일각에서 조문의 필요성을 주장했고 북한 측은 거의 협박성의 조문 요구를 해 왔으나 정부는 이들의 경우에 한해 이를 허용했다. 생전에 서로의 관계가 어떠했든 죽은 다음엔 애도를 하는 게 도리라는 주장이 있었다. 남한과의 대화 상대이니까 조문을 해야 한다는 요구도 나왔다. 특히 6·15공동선언과 10·4정상선언을 통해 남북화해와 협력의 이정표를 세운 당사자인 만큼 조문을 하는 게 마땅하다는 명분이 제시되기도 했다.

그걸 다 감안한다고 해도, 개인 차원의 조문을 허용한 것만으로 부족함은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사자에 대한 도리’를 말하기로 한다면 북한 김씨 왕조의 학정 아래서, 학대받고 굶주려 죽어간 수많은 동포들을 먼저 애도하는 게 순서다(6·25 이래 북한 측이 우리에게 가한 수없이 많은 도발과 살상행위는 일단 우리 가슴에 묻어두기로 하자). 대화 상대라고는 하지만 언제나 일방적이었다. 화내고 틀어지고 돌아서기를 항다반사로 하면서 뒤로는 핵무기나 만드는 상대였을 뿐이다.

6·15공동선언과 10·4정상선언의 의의를 강조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우리가 이해하는 것과 북측의 의도는 천양지차다. 북측이 이를 집요하게 강조하는 까닭은 ‘김 위원장이 직접 서명한 문서’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남측 대통령들이 평양에 가서 김 위원장과 만난 후 받은 문건이다. 북한 당국자들이 이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지는 불문가지다. 대등한 관계라고 생각했다면 김 위원장이 답방을 안했을 리 없다. 김 전 대통령이 답방을 요청했고 김 위원장이 긍정적으로 답변했다지만 그쪽에서는 꿈에라도 그럴 생각이 없었을 터이다.

남북 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문건으로 말하자면 ‘남북기본합의서’를 덮을 게 없다. 양측 정부의 총리들이 오랜 기간 회담을 거듭해서 만들어내고 남측 국회, 북측 최고인민회의의 동의를 거쳐 남측 노태우 대통령, 북측 김일성 주석의 비준까지 마친 문서였다. 그런데도 김정일 시대에 들어 이는 잊혀지거나 밀쳐지고, 그가 서명한 문건이 이를 대신했다.

‘제왕의 문건’에 집착 말기를

거기는 국가와 개인(통치자), 공과 사가 미분화된 사회다. 말하자면 전근대적 가산제 국가 형태를 가진 곳이다. 국가도 인민도 통치자의 소유다. 통치자의 말이 곧 법이다. 김씨 왕조가 계속된다고 가정할 때 앞으로는 김정은의 서명이 든 문건이 그 이전의 모든 문건 위에 놓일 것이다.

반면에 남한은 법치국가다. 대통령의 말이나 행위가 법에 우선할 수 없다. 물론 정상회담 결과로 나온 ‘공동선언’도 조약에 준하는 문건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의회의 비준 동의를 거친 조약의 상위개념이 될 수는 없다.

북측이 ‘공동선언’을 남북관계 및 통일의 원칙을 규정한 대장전이나 되듯이 선전한 것은, 이른바 ‘위대한 김정일 동지’가 남한 대통령에게 들려 보낸 교시쯤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당연히 남한 정부는 이를 남북기본합의서의 첨부문서 정도로 삼았어야 했다. 그런데 당시의 정부 당국자들도 덩달아 이를 ‘민족화해와 통일의 대장전’으로 부각시키고 선전했다. 남한 당국마저도 공과 사를 뒤섞어버린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물론, 앞으로 등장할 대통령들도 자신의 이름을 문서에 쓰고 남기기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대통령은 가부장적인 제왕이 아니라 제도 속의 직책임을 한시라도 잊지 말 일이다. 북한의 통치자가 제왕노릇을 한다고 해서 덩달아 그 흉내를 내려하면 언제나 저쪽 의도에 끌려 다닐 수밖에 없다. 위대한 이름은 바위나 문서에 새겨지는 게 아니라 국민 마음과 역사에 새겨진다는 것을 명심하기를 미래의 대통령들에게 바란다.

이진곤 논설고문·경희대 객원교수 jing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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