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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1912∼1996)

낡은 질동이에는 갈 줄 모르는 늙은 집난이같이 송구떡이 오래도록 남어 있었다

오지항아리에는 삼춘이 밥보다 좋아하는 찹쌀탁주가 있어서

삼춘의 임매를 내어가며 나와 사촌은 시큼털털한 술을 잘도 채어먹었다

제삿날이면 귀머거리 할아버지가 예서 왕밤을 밝고 싸리꼬치에 두부산적을 꿰었다

손자 아이들이 파리 떼같이 모이면 곰의 발 같은 손을 언제나 내어둘렀다

구석의 나무말쿠지에 할아버지가 삼는 소신 같은 짚신이 둑둑이 걸리어도 있었다

옛말이 사는 컴컴한 고방의 쌀독 뒤에서 나는 저녁 끼때에 부르는 소리를 듣고도 못 들은 척 하였다


고방(庫房)은 요즈음 이름조차 낯설 것이다. 창고라 하면 알아들을까. 고방은 그냥 창고가 아니었다. 주로 귀한 먹거리들이 저장돼 있었다. 안채와 떨어진 아래채에 있었다. 집난이는 출가한 딸을 친정에서 부르는 말. 나무말쿠지는 나무로 만든 옷걸이. 임내는 흉내. 둑둑이는 많이 있다는 뜻이다. 한 둑이는 열 개를 의미한다. 백석이 아니면 영영 잃어버렸을 북방 언어다. 내년은 백석 탄생 100주년의 해다. 백석이야말로 우리 민족어의 고방이다.

정철훈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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