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기록에 강하다. 훈민정음해례본, 직지심체요절,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조선왕조의궤, 팔만대장경판, 동의보감, 5·18관련자료. 유네스코에 등재된 기록유산 238건 가운데 9건을 올렸으니 4%를 차지한다. 세계 6위, 아시아 1위다. 잦은 외침과 화재 등으로 유실의 위험성이 높은 사실을 고려하면 놀라운 수치다. 세계문화유산도 9건이지만 비율은 1%에 머문다.

기록유산의 백미는 조선왕조실록이다. ‘태조강헌대왕실록’부터 ‘철종대왕실록’까지 472년간에 걸친 25대 임금들의 기록 28종을 말한다. 실록은 왕이 바뀔 때마다 승정원일기 등을 토대로 별도로 편찬한다. ‘고종태황제실록’과 ‘순종황제실록’은 여기서 제외되는데, 조선총독부가 편찬하면서 사실을 많이 왜곡한데다 실록 편찬의 엄격한 규칙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문으로 적힌 왕조실록은 1993년에 한글로 번역됐다. 1968년부터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1972년부터는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가 맡아 413책으로 간행했다. 지금은 국사편찬위원회(sillok.history.go.kr)나 번역원(db.itkc.or.kr) 사이트에 들어가면 원본과 한글번역을 누구나 볼 수 있다. 고전번역원의 한국고전종합DB는 조선왕조실록 외에 승정원일기, 일성록과 문신들의 문집까지 실었다. 북한은 우리보다 앞서 1975년부터 1991년까지 국역사업을 추진하여 총 400책을 펴냈다.

이 위대한 기록물이 영어로 번역된다고 한다. 국사편찬위원회가 400억원을 들여 2033년 완역한다는 목표다. 장장 20년이 소요되는 대장정이다. 20년은 경복궁 1차 복원에 들인 시간과 맞먹는 아득한 시간이다. 올해부터 3년간은 ‘터 닦기’ 기간으로 잡아 용어와 표기의 기준을 세운 뒤 샘플을 뽑아 시험번역을 한다. 본격적인 번역은 빨라야 2014년에나 시작될 전망이다.

그러나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먼저 텍스트가 문제다. 기존 한글본은 번역의 주체가 다른데다 시간과 예산에 쫓기다보니 오역 투성이다. 한 달에 올라오는 지적이 A4용지 8장 분량이다. 내용도 ‘생겼디’(생겼다)’와 같은 단순 오자부터 선조 때 장군 ‘원균’을 ‘윤원’으로 적는 중대 오류까지 이루 말할 수 없다. 마침 고전번역원이 재번역 5개년 계획을 세웠으니 영역 스케줄 또한 여기에 맞춰야 할 것이다. 전문인력 양성도 큰 숙제다. 속성 국역본의 실패를 맛보지 않으려면 준비를 단단히 해야한다.

손수호 논설위원 nam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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