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종 칼럼] 고승덕 폭로의 역설 기사의 사진

우리가 어렸을 때 어디가 까닭 없이 아프다고 하면 어머니들은 크려고 그런다고 하셨다. 요즘의 좀 유식한 체하는 말로 하자면 성장통이라는 것일 터이다.

며칠 전 현역과 예비역이 섞인 언론인들과 정치인들이 자리를 같이했다. 고승덕 의원이 폭로한 한나라당 전당대회 돈 봉투 사건이 화제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언론인 출신 어떤 이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물었다. 우리가 고 의원 폭로 내용을 처음 알았다면 보도를 통해 지금처럼 크게 이슈화했을까.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또 한 번 성장통 겪는 정치

우리 또래의 기자들이 일선에서 뛸 때 당권이나 대권 후보 자리가 걸린 전당대회에서 국회의원이나 지구당위원장에게 300만원짜리 돈 봉투가 돌려지는 건 뉴스도 아니었다.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하면서 대선에서 여당 후보들의 캠프가 조 단위의 돈을 뿌렸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당선된 후 일체의 정치자금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한 어느 대통령의 핵심 측근에게 기자가 그러한 선언이 좀 더 호소력을 갖도록 기왕에 쓴 대선 자금을 고백하는 게 어떠냐고 떠봤다. 그 핵심 측근의 대답인즉, 하도 여러 채널로 자금이 걷히고 쓰여 그 규모가 정확히 파악되지 않을 뿐 아니라, 솔직히 파악된 규모만도 너무 엄청나 감히 국민 앞에 공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또 권위주의 정권시절에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L, K 등 이름을 대면 다 알만한 권력 실세들은 선거 때 100억원을 넘게 뿌렸다고 측근들에게 털어 놓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주변에서는 그가 선거를 이용하여 뿌린 것보다 몇 배 더 많은 돈을 긁어모았다고 수군거렸다. 그런 실세들은 돈을 들고 찾아온 사람일지라도 굵직한 케이스라야 얼굴 보고 악수 한 번 해 주지, 어지간한 사람은 그냥 봉투만 선거 사무실에 놓고 가라고 하기 일쑤였단다.

20∼30년 전에 지금의 몇 십 배에 달하는 화폐가치를 가진 돈들이 그 같은 단위로 오간 걸 아는 사람들에게 요즘 여당 전당대회에서 국회의원에게 300만원짜리 봉투가 돌려졌다는 게 대수롭게 여겨지겠는가. 달랑 버스 한 대 분량의 전당대회 선거인단을 동원하기 위해 들어갈 최소한의 경비에도 미치지 못할 것 같다는 의견들이었다. 또 그만한 돈 안 쓴 당권·대권 후보가 있었겠느냐는 말들이었다. 여담이지만 1979년 당시 야당 전당대회를 취재하던 기자는 어느 대표 후보 캠프가 대의원들에게 3만원짜리던가 봉투를 돌린 의혹이 있다는 기사를 썼다가 증거를 대라는 그 캠프의 항의를 받고 얼마간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아픈 만큼 성숙해질 것

고 의원의 돈 봉투 폭로 사건 파장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가고 있다. 집권 한나라당을 다 태워버리고 정치판 전체를 갈아엎을 것 같은 기세다. 조 단위의 선거 자금을 쓰고도 무사했던 대통령 후보들이 있었고, 총선에 출마하여 돈을 물 쓰듯 쓰고도 오히려 몇 백억원씩 축재했던 정치인들이 있었던 20∼30년 전과 비교하면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로 변했다고나 할까.

돈 봉투 사건 희생자가 상당수 나올 것이다. 어쩌면 한나라당의 친이명박계, 나아가서는 한나라당 전체가 쓰나미에 휩쓸릴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희생의 제물로 바쳐진 쪽에서는 “속을 들여다보면 여야, 주·비주류, 너나 할 것 없이 다 마찬가지인데 왜 나만, 왜 우리만 갖고 그러느냐”고 항변할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희생 제물이라는 게 본래 그렇게 남을 대신하여 바쳐지는 운명을 타고난 것을. 또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정치라는 게, 민주주의라는 게 누군가의 희생을 먹고 자라는 잔인한 존재인 것을.

성장통의 원인에 대해선 의학적으로 정확히 밝혀진 게 없지만, 어린이의 뼈가 자라는 만큼 근육의 성장이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어쩌면 이번 돈 봉투 사건도 국민들의 정치권에 대한 도덕 요구 수준은 높아지는데 정치권이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앓게 되는 성장통일 것이다. 이번 희생자들에겐 안 된 얘기지만 그들이 아픈 만큼 우리 정치가 성숙해질 것이다. 정치판의 고질적 치부를 드러낸 고승덕 의원의 돈 봉투 폭로 사건에 담긴 역설이다.

백화종 부사장 wjbae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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