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엄상익] 정당한 재판과 너그러운 비판 기사의 사진

“영화 ‘부러진 화살’이 제기하는 주제보다 다른 의견을 인정 않는 풍토가 문제다”

우연히 대한변협신문의 편집인을 맡게 됐다. 타블로이드판 12면의 작은 신문이다. 기사작성은 변호사를 겸직하는 나와 보조하는 한 명의 변협 직원이다. 무엇을 쓸까 고민했다. 매주 한 명씩의 변호사를 찾아가 삶의 현장과 고민을 듣고 인터뷰기사를 썼다. 돋보이는 철학을 가진 모범이 되는 변호사들을 소개함으로써 빛과 소금이 되게 하고 싶었다. 소외된 변호사들의 모습도 있는 그대로 발굴해 보라는 요청이 있었다.

때마침 이슈가 된 ‘부러진 화살’이라는 영화를 봤다. 모델이 된 사람은 전문가 사회의 변경쯤에 위치한 노동전문 변호사였다. 주인공인 박훈 변호사를 만났다. 진폐증으로 죽은 광부의 아들로 주방용품을 팔러 다니기도 한 특이한 경력의 소지자였다. 사법시험에 합격한 이후에도 월급 80만원의 노동전문 변호사의 길을 택했다.

재판장이 1심에서 증거조사를 했는데 항소심에서 다시 할 필요가 없다면서 증거신청을 배척하더라고 했다. 그건 관점의 차이일 수 있었다. 대화 중에 더 중요한 내용을 발견했다. 판사의 의무가 법률의 해석까지인지, 나아가 인간의 본질까지를 심판할 수 있는지였다. 박 변호사는 석궁사건을 엘리트주의 간의 충돌이라고 평가했다. 주심인 이정렬 판사가 판결에서 나이 든 김명호 교수의 자질까지 거론한 데서 불꽃이 튀었다고 했다. 이해가 갔다. 이 판사 역시 독특한 판결과 비밀을 지켜야 할 합의사항을 공개한 강한 주관을 가진 인물 같았다.

언론에서는 다양한 견해가 표출됐다. 법원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 언론도, 영화를 비판한 언론도 있었다. 영화의 허구성을 비판하며 감독을 깔아뭉갠 사람도 있다. 글은 비판이라기보다는 비난에 가까워 모델이 된 박 변호사를 언론플레이를 하는 괴짜라고 공격했다. 영화를 만든 정지영 감독은 독한 마음을 먹고 시사회에 참석했다가 악의적으로 쓴 글이라며 분노했다.

대한변협신문은 작지만 독립적이다. 광고주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고 경영체계도 없다. 1만2000명 지식인을 대변하는 단체의 입으로 성역 없이 바른 소리를 해줄 수 있다. 1면 기사에서 신문의 칼럼 한 줄을 인용했다. 필자의 이름을 적시한 건 논문같이 정확한 출처를 밝히고 소송에 걸릴 각오도 했다는 의미다. 즉각 그 필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내가 인터뷰했던 박 변호사와 같은 부류라고 몰아쳤다. 그러면서 그는 당신을 혼내는 글을 준비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다음 날 “사법부의 신뢰를 허무는 이기적인 악의가 도사리고 있다”면서 “대한변협신문이 황당한 석궁사건 변호사를 인터뷰한 것”이 그 상징이라는 글을 게재했다. 심지어 “글쓴이가 법률가가 맞나 싶다”고 인격적 모독까지 곁들였다.

그 글을 읽고 내가 법률가가 맞는지 반성해 보았다. 인터뷰기사를 쓰는데 굳이 적용법조문을 검토할 필요는 없었다. 어쩌면 광부 아들이라든가 노동전문 변호사를 하고 있다는 성향을 추측해서 그러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의 본질에 대해서도 다시 신중히 생각해 봤다. 감독의 날카로운 눈은 법조인인 내가 습관같이 젖어 있던 일면을 각성시켰다. 증거채택 여부는 당연히 판사의 전권으로 알았다. 그러나 영화는 판사가 증거신청을 받아들이느냐 그걸 믿느냐 여부에 따라 진실이 전혀 달라질 수 있다는 문제를 제시하고 있었다.

물론 재미를 위해 극적으로 일부를 부각시킨 부분은 있었다. 그러나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장미에 구태여 현미경을 들이대 분석하겠다는 건 의미 없다는 생각이다. 헌법은 국민이 정당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명시하고 있다. 어떤 판사의 권한도 국민의 정당한 재판을 받을 권리 위에 군림할 수 없다. 영화가 내게 던지는 의미는 헌법에 규정된 국민이 정당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지키자는 것이었다.

다른 생각에 대해 토론하고 비판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생각이 다르다고 인격모독과 비난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지금 우리사회에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생기는 마찰이 너무 팽배해 있다.

엄상익 변호사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