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이승한] 겸손 기사의 사진

18세기 미국의 영적 부흥을 이끈 조나단 에드워드(1703∼1758)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변화된 사람에게 나타나는 ‘은혜롭고 거룩한 정서의 표지’를 여섯 가지로 설명했다. 첫째 영적 초자연적 신적 영향과 작용, 둘째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사랑, 셋째 하나님의 일들의 도덕적 탁월성, 넷째 신령한 지식, 다섯째 확신, 여섯째 겸손.

에드워드는 이 가운데 겸손이야말로 거룩한 정서의 진정한 표지라고 강조했다. 성경에는 중생하고 변화된 그리스도인들에게 합당한 성품들이 기록돼 있다. 온유 유순 자비 긍휼 동정심 용서 관용 인내 화평 등이다. 겸손도 그중 하나다.

겸손이란 무엇인가. 에드워드는 진정한 기독교의 본질적 요소이며 기독교인의 커다란 임무인 자기부인(self-denial)의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기독교적 자기부인은 세상적 성향을 부인하는 것, 곧 명예 권력 부 쾌락 정욕 등 세상적 목표들에 대한 욕심을 버리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자기의 영광을 버림으로 자신을 비우는 행위라고 했다.

주후 300년대 신학의 기초를 완성한 성자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덕목을 묻는 질문에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라고 했다. 이처럼 겸손은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덕목임에 틀림이 없다.

크리스천의 최고 덕목

오늘날 그리스도인으로서 최소한의 겸손한 양심을 보여주는 사람이 많지 않다. 겸손의 모양은 있으나 겸손의 능력이 없다. 나부터 겸손하지 못한데 감히 겸손하지 못한 세태라고 비판하는 게 어리석은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은혜롭고 거룩한 정서의 표지’를 지닌 크리스천을 찾기 힘든 세상임은 분명하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이 말라버린 것을 보고 알 수 있다. 예배를 드려도, 성경말씀을 읽고 묵상을 해도, 은혜로운 찬양을 해도, 눈물이 나지 않는다.

연합기관의 주도권을 놓고 벌이는 치졸한 법정싸움, 영적 지도자에 대한 고발 등을 보면서 찬송가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는 머지않아 찬송가집에서 삭제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마저 든다.

기독교는 눈물의 종교다. 교회가 핍박을 당할 때 눈물로 애통하며 굳건히 세웠다. 겸손한 사람은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 애통하는 사람이다. 처음 예수를 영접하고 얼마나 그 은혜에 감격하며 눈물을 흘렸는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 때문에 기도하며 눈물을 흘리고, 찬양하며 눈물을 흘리고, 남들로 인해 고통을 받지만 그것마저도 감사하며 눈물을 흘리던 때가 모든 크리스천들에게는 있었다.

겸손의 눈물을 회복하자

그래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그런 사람은 하늘로부터 위로를 받기 때문이다(마 5:4). 회개하고 변화된 그리스도인들은 ‘개가 토한 데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죄악 된 생활로 돌이켜서도 안 된다. 욕망의 바벨탑을 쌓기는 쉬워도 무너뜨리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욕망의 바벨탑을 무너뜨리는 용기가 겸손이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의 회개촉구 울림이,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의 통곡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잡혀 목숨 바쳐 전도했던 사도 바울의 고난이,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우리가 따라야 할 겸손이다.

이승한 종교국장 sh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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