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곤 칼럼] 평화의 사도 영면하다 기사의 사진

경희대학교 정문, 등용문을 들어서서 150m쯤 걸어가면 높직이 솟아 있는 조형물을 만난다. 창학정신 ‘문화세계의 창조’가 새겨진 교시탑이다. 문화야말로 21세기의 대표적 코드다. 그런데 이 탑이 세워진 해는 1955년이다. 6·25전쟁의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 있던 그때 청년 조영식은 국내 최대의 석조건물과 이 교시탑, 그리고 교문을 세웠다.

돈이 있어 시작한 일이 아니었다. 전쟁 중이던 51년 피난지 부산에서 30세의 한 청년은 천막건물과 빚뿐이던 가(假)인가 상태의 초급대학을 떠맡았다. 당시 여당격이던 공화민정회 조사국장 겸 법제사법전문위원 자리를 버리고 교육에 뛰어든 것이다. 남들 보기엔 과한 열정이고 용기였다. 그는 팔 수 있는 모든 재산을, 빌릴 수 있는 모든 돈을 다 투입했다.

오토피아의 구현을 위하여

전쟁으로 국민의 삶터는 깡그리 파괴됐다. 사람의 사람다움까지도 여지없이 부서지고 으깨져버렸다. 이는 한국인만의 현실이 아니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인류가 함께 겪어야 했던 문명사적 참화였다. 이 폐허 위에서 그는 ‘인류사회 재건’을 소명으로 받아들였다. 재건된 인류사회는 ‘곧 문화세계’일 것이었다. 그리고 조영식에게 그것은 ‘오토피아’였다. 당연히 와야 할, 반드시 오게 해야 할 세계, 사람이 모든 가치의 중심에 서는 세상을 그는 교육을 통해 이룰 수 있다고 확신했다.

이 오토피아에 이르는 과정을 그는 ‘네오르네상스’로 명명했다. 인간의 자기 확인, 문예의 부흥, 평화세계의 구축은 인류사적인 명제이고 과제였다. 그는 이 같은 인식으로 60년대 초반부터 지구적 범위의 교육운동, 평화운동에 앞장섰다. 1981년 유엔총회가 만장일치로 세계평화의 날을 제정한 데는 그의 헌신적 노력이 뒷받침됐다. 작년 10월 유엔AI와 경희대학교가 제30회 세계평화의 날 기념 국제회의를 공동개최한 배경 또한 다르지 않다.

한 선각자의 삶을 조명하자고 해서 쓰는 글이 아니다. 한국의 오늘을 있게 한 것은 교육이다. 그 교육, 특히 고등교육을 부흥시킨 것은 정부나 정치권이 아니라 탁월한 교육 선각자들의 이상과 헌신이었다. 이들은 국가가 감당해야 할 몫을 스스로 원해서 떠안아 오늘의 한국을 이루는 든든한 토대가 돼 주었다. 그 바탕 위에서 나라와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들, 가끔은 이들의 공로를 기억해 줄 수 없을지 물으려는 것이다.

네오르네상스 시대를 열다

정치인과 기업인은 자신이 뭔가 되고자 하고, 뭔가를 얻으려 하는 사람들이다. 미안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교육자는 베풀려는 사람이다. 남을 위해, 세상을 위해, 미래를 위해…. 이 점에서 교육자들은 존경 받아야 한다. 대학은 존중되고 중시돼야 한다. 대학은 우리의 미래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지금 한창 국회의원이 되고, 다수당이 되겠다고 안간힘을 쓰는 정치인과 정당들이 먼저 이를 생각해 주길 바란다. 그리고 정권을 차지하겠다고 나선 이들은 교육자들로부터 겸손과 희생과 봉사를 배웠으면 한다. 남을 깎아내리고 비난하고 조롱하고 해서 정권을 잡을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위대한 정신으로 오래 남기는 어렵다. 진부한 얘기지만 미국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스스로 쓴 묘비명에 대통령 경력을 넣지 않았다. 그렇지만 ‘버지니아대학의 설립자’는 명기했다. 대통령으로보다는 교육자로 오래 기억되고 싶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게 교육자의 보람이고 자부심이다.

경희대학교는 교육의 현장에서 네오르네상스의 표상으로, 또 그 실천의 일환으로 후마니타스칼리지를 설치했다. 대학 새내기들을 위한 인문교양대학이다. 아버지를 빼닮은 지금 총장의 아이디어와 주도로 세워진 이 대학은 인문교육 교양교육의 전범이 되고 있다. ‘사람과 사람 사는 세상’을 탐구하고 고민하는 데서 대학생활을 시작하게 하자는 뜻이라고 짐작하고 있다.

네오르네상스를 주창하고 세계평화를 희구하던 조영식 박사가 일전에 별세했다. 생전에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이룬 모든 것을 제자들에게 남겨주고 홀로 가벼이 떠났다. 오래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이진곤 논설고문 경희대 객원교수 jing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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