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송병구] 소리는 많으나 음성은 없다 기사의 사진

‘위대한 침묵’이란 영화가 있다. 아니 있었다. 지난봄, 몇몇 상영관에서 개봉했지만 금세 사라졌다. 바쁜 현대인들은 낯선 제목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알프스의 깊은 계곡 카르투지오 수도원의 일상을 담은 다큐멘터리는 1688년 현재의 모습으로 건축된 이후 한 번도 외부에 공개된 적이 없다는 영화외적 요소 때문에 흥미를 끌어당겼다. 그러나 영화는 흥행을 염두에 두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영화를 보는 일에도 극진한 인내심이 필요했다.

수도사들은 엄격한 규율 아래 자급자족의 원칙을 지키며 침묵 수행을 한다. 하루에 한 끼만 먹고, 각자 독방에서 일상생활을 한다. 하루 세 번 모여 함께 기도하고 예배를 드리는 시간과 일주일에 한 번 대화가 허용되는 4시간의 산책 외에는 침묵을 강요받았다. 산책 시간에도 마을 주민과 무엇을 주고받거나, 말을 걸어서는 안 된다. 제한된 공간과 한정된 시간 속에서 조용히 자신의 목소리를 낮춤으로 은밀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했다.

고요함 상실한 시대의 경박함

놀라운 일은 그들이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를 바싹 다가서도록 한다는 점이다. 침묵에는 사람을 귀 기울이도록 하는 힘이 있었다. 그런 까닭에 예로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선택한 방식이 바로 침묵이었나 보다. 그런 침묵이 영화로 만들어져 신앙의 깊이를 더욱 소리 높여 세상으로 알리게 된 것은 역설이다. 침묵 때문에 더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셈이다.

우리가 사는 공간에서 더 이상 침묵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도무지 조용한 것을 참지 못한다. 지하철 안에서 대부분은 핸드폰으로 통화하거나, 영상을 보거나, 게임을 한다. 익숙한 손가락 놀림으로 쉼 없이 문자를 보내거나, 검색하거나, 음악을 듣는다. 심지어 졸고 있는 사람도 이어폰을 꽂고 있다.

사람들은 손에 작은 컴퓨터를 쥐고 살지만, 더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산다. 철마다 진화하는 빠르고 강력한 도구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하나님 사이를 더욱 친밀하게 만들어 주지는 못한다. 이 편리한 무기는 생각하고 묵상할 여백의 시간을 좀처럼 돌려주지 않는다. 외려 스마트폰의 저장능력은 기억력의 감퇴를 가져왔고, 무한한 검색기능은 조건반사신경만 자극할 뿐이다.

편리함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조만간 불편함을 그리워하지 않을까? 기왕에 결심한 신앙생활은 조금 불편할 필요가 있다. ‘사서 하는 고생’이 값진 인생의 선물이 되었듯이, 번거로운 수고를 통해 얻는 기쁨이 내 몸의 양약이 될 것은 두말 할 나위 없다. 예수께서 권하는 대안적 삶은 항상 ‘좁은 문’이지 않던가.

사순절은 침묵 사랑하는 절기

오늘 교회를 연상할 때 가장 쉽게 떠올리는 것은 소란함과 분주함일 것이다. 이른바 열심인 교회일수록 더 바삐 돌아가고, 소란함을 이벤트로 삼는다. 시끄럽고 번잡한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종교마저 고요함과 평화로움을 제공하지 못한다면 참 끔찍한 일이다. ‘소리는 많으나 음성은 없다’는 라틴 격언처럼 우리가 찾는 것은 나직한 음성이 아닌가. 사람들은 교회가 좀 더 고요해졌으면, 침묵을 사랑했으면, 그럼으로써 평안과 안식을 제공해 주었으면, 그런 기대를 하지 않을까.

지금은 사순절기다. 이 절기는 소리의 볼륨을 낮추고, 고요함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세미한 음성에 귀 기울이는 때이다. 과연 침묵을 사랑하는 시간이요, 그럼으로써 하나님과 더 가까이 친밀감을 누리는 기회가 될 것이다.

송병구 색동감리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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