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순만 칼럼] 부담스러워져가는 한국의 진보 기사의 사진

“진보 정치세력… 친근한 프로타고니스트인가, 반대만 일삼는 안타고니스트인가”

이정희 통합진보당 공동대표는 두 개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18대 국회에 초선으로 진출해 가장 돋보이는 의정활동을 펼쳤다는 평가(2009년)를 받으며 진보정당 공동대표까지 오르는 과정에서 보여준 청순함이다. 다른 하나는 김선동 의원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최루탄을 터뜨린 행위를 ‘의거’라고 주장하는 류의 독선적인 모습이다. 이 두 이미지가 교차하면서 때로는 선한 이정희가 되고 때로는 불통의 이정희가 된다.

서울 관악을 야권 후보 단일화 경선에서 여론조사 응답 조작사건으로 사퇴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모습 역시 그렇다. 정치판의 재목으로 보였던 그가 보좌진의 잘못으로 국회의원 후보에서 사퇴하는 모습은 안타깝다. 그러나 경기동부연합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 색깔론이라며 고소하겠다고 맞서는 모습은 답답한 정치인의 초상처럼 보인다. 일부 언론에서 경기동부연합을 진보정당을 조종하는 정체불명의 집단처럼 묘사한 측면은 있다. 그럴수록 설명이 필요하다. 이를 색깔론으로 받아치는 것은 진부해 보인다. 오늘날의 정치는 말싸움의 영역이 아니라 호소력의 영역에서 펼쳐지는 것 아닌가.

우리 사회 진보 정치세력은 대체로 무겁고 답답하다. 한국의 진보는 빠르게 변하고 있다. 좋은 쪽이라기보다는 기존의 부패한 정치로 빠르게 진입해서 낡은 수법과 부족한 전문성으로 소리를 지르는 모양새다. 수권 정당으로서의 포용력과 전문성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준다. 한·미 FTA나 제주 해군기지와 같은 국가 중대현안을 다룰 때 특히 그렇게 보인다.

진보 진영이 자랑해왔던 도덕성도 평준화 내지는 하향화하는 것 같다. 크고 작은 비도덕성이 너무 눈에 띈다. 큰일을 위해 작은 불법은 용인될 수 있다고 생각하던 시절은 지났다. 민주화된 사회에서 합법적인 절차와 과정을 중시하지 않는 사람들은 시민들에게 부담을 줄 뿐이다.

통일이 지상과제라는 것에 동의하더라도 옳지 않은 북한을 감싸는 종북주의는 납득하기 어렵다. 한국의 독재정치를 비판하면서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독재국가 북한을 비판하지 못하는 모습은 시민들을 피곤하게 한다. 정권교체를 주장한다고 솔깃해하던 시절은 갔다. 시민들은 왜 정권교체를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를 궁금해한다. 정권교체를 위한 야권연대라면서 밥그릇 싸움, 공천싸움, 세력대결…그런 것들은 왜 그렇게 많은가.

야권연대의 상징인 이정희 대표, 그를 아끼는 사람에게는 섭섭한 일일지라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상대를 적으로 돌리는 정치는 미숙한 정치다. 이번 사퇴가 반성과 전망의 계기가 됐으면 한다. 그의 사퇴를 두고 ‘진보의 도덕성을 보여줬다’고 하는 평가는 진영의 논리일 뿐이다.

시민들에게 부담 없이 가깝고 친절한 프로타고니스트로 갈 것인가, 아니면 교조주의적 신념을 갖고 모든 것을 반대하는 안타고니스트로 갈 것인가. 상대를 악으로 규정할 것인가, 언제라도 파티에 초청하고 싶은 파트너로 대우할 것인가.

아들을 잃고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해 아내마저 떠나간 한 남자가 있다. 그가 길을 가는데 앞에서 한 여인이 때가 꼬질꼬질한 아이의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다. 여인은 아이에게 짜증을 부리며 아이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의 빠른 걸음을 재촉했다. 복잡한 사거리에서 아이가 엄마의 손을 놓쳤다. 여인은 아이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혼자서 빠르게 걸어갔다. 아이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그 광경을 본 남자는 아이의 곁으로 가서 그를 감싸주었다. 여인은 뒤를 돌아보고 더 심한 욕설을 해댔다. 남자가 말했다. “이 아이가 싫으면 내가 데려갈까요?”

‘오늘의 양식’이라는 소책자에서 본 글이다. 비유로 얘기해서 아이를 우리의 기대에 못 미치는 한국사회라고 하자.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의 진보는 아이 엄마의 모습인가? 아이를 부축해 주는 남자의 모습인가?

임순만 편집인 so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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